지난 가을 한 여성 노동자가 서울노동권익센터를 찾아왔다. 그녀는 4년 6개월간 일하던 일자리를 어느날 갑자기 잃었다고 한다. 6개월마다 근로계약서를 새로 썼지만 이곳은 원래 6개월 단위로 모든 일이 돌아가는 곳이었다.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쫓겨나는 경우는 없었고,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일하다 보면 어느 날 형식적으로 계약서에 사인만 받아갔다. 10년 넘게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녀가 일자리를 잃은 이유는 모시던 상사가 정년으로 그만 두어서다.

이곳은 대학이다. 그리고 그녀가 일했던 곳은 연구실이다. 그녀는 연구조교라고 불리며, 교수가 지시한 모든 일을 했다. 우편물 수발, 행사 기획, 홍보, 심지어 세미나 참석 연구자들 기차표도 끊었다. 그녀는 학과 전공자도 아니었고, 당연히 담당교수는 지도교수도 아니었다. 이른바 ‘비학생조교’였다.

▲ 서울대 비학생조교들이 2017년 5월16일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대학노조
▲ 서울대 비학생조교들이 2017년 5월16일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대학노조

이런 일은 이곳이 일반사업장이 아닌 대학이라서 가능했다. 대학에는 장학금 받고 노동하면서 노동자로 인정도 받지 못해 다투는 조교들도 있으니, 그녀의 사정은 조금 나은 편이다. 그녀의 문제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에 관한 법률, 소위 기간제법에 있다. 기간제법 제4조는 기간제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총 근무기간이 2년이 넘으면 무기계약직으로 간주한다. 계약기간을 몇 번 반복하였는지는 상관없다. 사용자가 기간을 정해 노동자를 채용했더라도, 근무기간이 2년을 넘었다면, 그 노동자에 대한 계약기간 만료통보는 곧 해고이고,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부당해고다. 다만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업무 자체가 한시적 성격의 것이거나 근로자의 학업이나 직업훈련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가 그렇다. 또 전문지식·기술을 가진 전문직이나 정부가 복지차원에서 제공하는 일자리도 예외다. 그런데 기간제법 시행령은 이러한 예외에 대학 조교를 포함시켰다. 이것이 그녀가 기간제법에 따른 고용보장을 받지 못하고, 학교로부터 쉽게 해고당한 이유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와 법원은 조교라고 모두 다 기간제법 예외로 보지는 않는다. 기간제법 예외인 조교는 “단순히 조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가 아니라 학업을 병행하거나, 전문지식·기술을 활용해 연구 내지 연구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 기간제근로자 보호라는 기간제법 취지에 맞게 사용자가 편의상 또는 본인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둔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 근로관계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노동법은 그 어느 법보다 ‘실질’을 중시한다. 연구조교라고 불리웠어도 실제 하는 일이 다른 노동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똑같은 노동자로 보호를 받는다.

▲ 한국일보 2016년 12월16일 11면
▲ 한국일보 2016년 12월16일 11면

교수연구실에서 사무를 담당하며 학업을 병행하지도 전문 연구자도 아니었던 그녀는 권익센터의 지원으로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지는 아직 모른다. 학교가 대법원까지 쟁송을 끌고 가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쟁송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해고될지 알 수 없는 그녀 같은 비학생조교들이 이 사건 결과에 따라서 고용이 보장될 수도, 그녀처럼 기간만료로 해고될 수도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이 노동 없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학이라는 곳도 그렇다. 그런데 유독 대학에는 연구나 학업이라는 이유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너무도 많다. 장학금을 받고 있어도 실제 하는 일이 노동자와 같다면 노동자이다. 연구조교라고 불려도 실제로 하는 일이 다른 노동자들과 차이가 없다면 기간제법의 보호도 똑같이 받아야 한다.

주목받지 못하고 혼자서 서성이는 누군가의 노동의 곁에 서는 일, 그곳에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쉽지만은 않은 길을 함께 찾는 일, 노동자지원센터의 초심은 거기가 아닐까.

▲ 최진혁 노무사.
▲ 최진혁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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