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인천퀴어문화축제 당시 보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은 성소수자들에게 언어·물리적 폭력을 가했다. 상당수 언론이 이를 ‘충돌’과 ‘대립’ 현장으로 그렸지만 피해는 대등하지 않았다. 혐오는 표현의 자유와 민원으로 정당화됐고 성소수자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린 것으로 분석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해 ‘증오범죄(hate crime)’를 막기 위한 법·제도적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요구가 나온다.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한국사회 증오범죄 진단과 대안: 2018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중심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는 정의당 이정미 의원실과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인천퀴어문화축제 비상대책위원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천퀴어문화축제 법률지원단 등이 공동 주최했다.

지난해 9월8일 인천 동구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은 약 11시간 동안 혐오 표현과 언어·물리적 폭력에 노출됐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 추산 1000명의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모여 축제 현장을 마비시켰다. 오전 11시부터 진행될 예정이었던 축제는 사실상 무산됐다. 인천퀴어축제 비상대책위는 당시 정신·신체·물적 피해규모가 총 1억 800여만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한국사회 증오범죄 진단과 대안: 2018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중심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제공
▲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한국사회 증오범죄 진단과 대안: 2018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중심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제공

고려대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 연구팀(팀장 김승섭 교수)이 참가자 3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 참가자 97.7%가 성소수자 비하 발언에 노출됐고, 85.9%는 욕설·조롱·비하를 당했다.

참가자들의 우울증상 유병률은 73.1%로 일반인구 7.2%(한국복지패널조사, 2017)의 10배를 훌쩍 넘는다. 89.5%는 급성 스트레스 증상을 보였고, 70.4%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예측됐다. 실제 이날 토론회에선 한 참석자가 축제 당시 반대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이 담긴 영상을 보다 잠시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한 참석자는 연구팀에 보낸 답변을 통해 “(반대 집회 참가자가) 내 가슴을 쥐고 ‘여자가 남자 맛을 안 봐서 레즈(비언)인 거다’ ‘나는 바로 이성애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 주변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하지 말라고 하면 휴대전화를 들이대며 우리 신상을 알리겠다며 협박했다”며 “그 와중에 경찰은 제지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축제 참석자 10명 중 8명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행한 이들 뿐 아니라 행정집행기관들의 방조를 문제로 지적했다. 폭력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참가자들의 인식 조사에서 87.9%는 인천동구청장을, 80.7%는 인천지방경찰청을 꼽았다 당시 현장 경찰인력을 지목한 응답 비율도 70.2%에 달했다.

류민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인천퀴어문화축제 법률지원단 변호사는 “현장의 수많은 채증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가해자는 신원이 특정되지 않아 경찰 수사망에서 벗어난 채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인천중부경찰서는 앞서 퀴어축제를 반대한 8명을 집회 방해 및 교통방해 등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으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폭력 혐의가 적용된 사람은 없다.

증오범죄는 흔히 인종, 피부색, 종교, 젠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 근거로 형성된 적대 혹은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로 정의된다.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최근 한국이 인종차별을 정의하고 금지하는 포괄적인 법을 마련하지 않은 데 유감을 표한 바 있다. 인종차별에 기인한 범죄를 분석하고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통계 자료 수집 메커니즘을 갖출 것도 권고했다.

소수자·인권 단체들은 차별·혐오 법제화의 한 수단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종인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국장은 “혐오범죄·증오범죄라고 법률적으로 규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경찰도 미온적인 부분이 있다”며 “2008년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뒤 장애인 인권이 향상된 건 사실이다.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차별 완화에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차별대응기획단장을 맡고 있는 강문민서 차별시정국장은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지지·연대·응원세력을 확보하고 만들 것이냐가 고민”이라며 “2008년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는데 형해화됐다. 법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통과될 수 있도록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의견과 조언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올해 전국 각지에서 열릴 퀴어문화축제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인권위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강문 국장은 “인권위의 협의 기능 등을 최대한 활용해 경찰청 차원에서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올해 모든 퀴어축제에 참여하는 분들이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고 축하할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많은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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