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1일 박근혜 정부 대법원의 재판거래 사법농단 사건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석하면서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대법원 앞에서만 입장을 밝히고 검찰 포토라인을 ‘패싱’해 논란이 됐다.

포토라인(photo line)은 다수의 취재진이 제한된 공간에서 취재해야 할 경우, 취재진의 동선을 제한해 혼란을 막기 위한 자율적 제한선을 말한다. 특히나 국민적 관심사가 높은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 수사기관에 출석할 경우 삼각형 모양의 포토라인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장면을 언론을 통해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면 경찰이나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들이 반드시 포토라인에 서야 하는 걸까. 사실 국민 누구나 포토라인에 서지 않을 권리가 있다. 법무부 훈령인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에도 ‘초상권 보호조치’로 검찰청 내 포토라인의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다만 공적 인물인 피의자의 소환이나 조사 사실이 알려져 촬영 경쟁으로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고 피의자가 동의하는 경우엔 청사 밖의 구역에서 예외적으로 촬영을 허용하고 있다. 이 경우 공보(취재 지원) 담당자는 “취재 과정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질서유지 통제선 설치, 통제 인력 배치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준칙에 나와 있다.

지난 1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포토라인을 그냥 지나쳐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 없이 청사로 들어갔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 전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았던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을 밝혔다. 사진=노컷뉴스
지난 1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포토라인을 그냥 지나쳐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 없이 청사로 들어갔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 전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았던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을 밝혔다. 사진=노컷뉴스
수사기관이 공인이나 유명인들을 공개 소환하고 이들에 대한 언론의 취재 경쟁이 불가피할 경우 국가기관도 언론과 협조를 통해 질서 유지와 취재 제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포토라인을 설정할지 말지의 결정은 전적으로 취재 기자단의 자율에 따르게 돼 있다. 카메라·사진 기자들이 많이 몰리는 취재 현장의 경우 출입기자들이 각 기자협회와 함께 협의해 포토라인을 정한다.

언론의 포토라인 운영과 관련해 기자협회 차원의 공식적인 서면 합의가 만들어진 건 지난 1994년 12월이다. 앞서 1993년 1월15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출두했을 때 포토라인 무너지면서 정 회장이 카메라에 이마를 부딪쳐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 등이 계기가 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와 한국사진기자협회가 1994년 ‘포토라인 운영 선포문’을 발표하고 “우리는 상호 간의 불필요한 경쟁으로 무질서한 취재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포토라인을 설정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선포문에선 “포토라인을 경계로 취재원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취재가 끝날 때까지 이를 지키며, 포토라인을 위반하는 기자가 소속한 언론사는 양 단체의 자체 규정에 의한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이후 2000년대부터 다양한 인터넷 매체가 생겨나고 기존 ENG카메라 기자들만이 아니라 6mm 카메라 기자들까지 취재 경쟁에 가세하면서 포토라인이 무너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2006년 카메라·사진기자협회와 인터넷기자협회가 공동으로 구체적인 운영 방법과 벌칙 규정까지 명시한 ‘포토라인 시행 준칙’을 제정했다.

▲ 지난 2016년 10월31일 ‘박근혜 정권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 피의자 최순실씨가 서울중앙지검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다 포토라인 안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면서 취재진과 경호원, 시위대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 2016년 10월31일 ‘박근혜 정권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 피의자 최순실씨가 서울중앙지검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다 포토라인 안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면서 취재진과 경호원, 시위대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김주성 한국일보 멀티미디어부 사진 기자는 “포토라인은 기자들 안에서 취재 현장 질서와 취재원 보호뿐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취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만든 것”이라며 “지금까지 기자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해 왔고 크게 문제 된 적이 거의 없었다. 외려 반대로 출석하는 사람들이 포토라인을 피해 나가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긴 적은 있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예를 들어 과거에 정보공개 청구가 어려울 때 기자들이 취재하려고 관공서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지곤 했는데 지금은 정보공개 청구 등 다른 방식을 통한 취재가 자유로워져 기자들이 그렇게 할 필요할 필요 없어졌다”며 “포토라인이 만들어진 배경에도 과거 밀실수사 등 자유롭게 취재할 수 없는 환경 때문도 있는데 그런 취재 자유가 충족된다면 굳이 몸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장은 “검찰 포토라인은 1990년대만 해도 청사 안에 있다가 검찰이 초상권과 인권을 존중해 안에서 못 한다 그래서 기자단이 밖에서 하겠다고 나오기도 했다”며 “포토라인이란 게 검찰 소환자에게만 적용하는 게 아니라 타 정부부처나 복잡한 행사장, 국회 등에서도 질서 유지를 위해 신사협정을 맺는 거여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공인들이 언론의 취재가 집중되는 포토라인을 피해 가려다 기자들이 다치는 경우도 있다. 안 회장의 경우에도 과거 전국경제인연합회 재벌 총수 모임 때 포토라인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몰래 올라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취재하다가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해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국민의 관심이 많은 이 회장의 모습과 신년 계획에 대한 생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취재였지만, 취재원들이 공개 취재를 원치 않을 경우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포토라인의 인권 침해 우려와 관련해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변호사는 “포토라인 자체는 강제 수단이 아니고 지나친 취재 경쟁을 막기 위한 자율적 통제선이어서 취재원이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며 “다만 기자단 쪽에서 공인들에게 미리 접촉할 수 있으므로 ‘들어올 때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를 조율하고 포토라인 취재가 이뤄진다면 좀 더 원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난 2014년 12월10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 청사 앞에 비선 실세 의혹으로 소환 조사를 받으러 오는 정윤회씨를 취재하기 위해 포토라인이 설치된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지난 2014년 12월10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 청사 앞에 비선 실세 의혹으로 소환 조사를 받으러 오는 정윤회씨를 취재하기 위해 포토라인이 설치된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아울러 공개소환제도가 검찰의 위상을 높이는 간접효과로 작용하면서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지난 17일 tbs 라디오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에 출연해 “시민이 관음증 환자도 아닌데 매번 피의자가 포토라인에 서 있는 똑같은 장면을 계속 봐야 하는 게 알권리인지 의문”이라며 “실제 포토라인에 세워놓고 망신 주고 낙인까지 찍었는데 혐의가 사실이 아니면 그 사람의 피해는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수사기관의 역할은 범죄 혐의자를 검거, 수사인데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노영희 변호사는 이 방송에서 “포토라인 문제는 양승태 사건뿐 아니라 모든 사건에 있었는데 이걸 도드라지게 꺼내면서 국민의 시선을 다른 데 돌리려는 꼼수 같아 보여 굉장히 불편하다”며 “검찰도 비공개 소환을 하면 되고 언론사도 과열되거나 단정적인 질문으로 국민 여론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취재하는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과 유럽 등 포토라인 관행이 없는 나라는 공인과 연예인에 대한 파파라치 보도 등 사생활 침해 피해도 심해 포토라인 자체를 없애기보다 인권을 더 보호하는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안형준 회장은 “독일 사례를 보면 출두 영상을 얼마나 오래 보관할 것인지, (포토라인에 선 피의자가) 무죄가 되면 영상을 쓰지 않고 양형에 따라 보존 기한을 정하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며 “기자들도 질문했을 때 답을 안 하면 더 독촉하지 않고 반론권을 보장하며 ‘기자가 나를 죄인 취급하는 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취재 방법을 바꿀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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