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성폭력이 뿌리 뽑히지 않는 원인은 결국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 안팎의 의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관계 기관들이 내놓는 대책은 현장에 적용되지 않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자체가 뿌리라는 것이다.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 전원과 여성폭력근절특별위원회 주최로 ‘왜 체육계 성폭력은 반복되는가-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는 체육계 전문가와 관계부처 인사들이 참석해 체육계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은폐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선수의 현재와 미래에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코치와 감독, 외부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인 합숙소와 훈련장, 사고가 났을 때 묵인, 방조 심지어 공조하는 침묵의 카르텔까지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에 최적화된 체육계 관행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진단했다.

▲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폭력근절특별위원회가 주최한 '왜 체육계 성폭력은 반복되는가-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폭력근절특별위원회가 주최한 '왜 체육계 성폭력은 반복되는가-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문경란 한국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체육계 인권 유린이나 침해, 폭력, 성폭력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이 계속돼 왔다. 소리가 없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 외침도 있었고 절규도 반복됐지만, 문제는 들을 귀가 없거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체육계 성폭력은 조재범 전 코치 성폭력 의혹 전후 이어진 체조, 빙상, 유도계 피해자 목소리를 중심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앞서 10여년 전인 2007년엔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 감독의 성폭력 의혹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해당 감독은 이후 대한농구협회 추천서를 받아 중국 프로농구팀 감독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문화관광부·교육인적자원부·대한체육회가 내놓은 대책은 △성폭력 지도자 영구제명 △선수 접촉·면담 가이드라인 수립 △체육계 통합성폭력신고센터 설치 △여성 지도자 할당제 도입 △상시 합숙제도 개선 △체육지도자 자격 강화 △체육지도자 아카데미 운영 등이다.

최근 문체부 대책은 이와 상당부분 겹칠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 대표성 측면에선 후퇴했다고 평가 받는다. 문 이사장은 “많은 분들이 지적한 대로 문제는 정책 제언이 아니라 집행 의지”라고 꼬집었다.

성폭력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살아남기 쉬운 체육계 현실도 문제로 지적됐다. 문체부 소관 대한체육회 규정에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규정조차 없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현목 문체부 체육국 사무관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다. 인권규정이나 윤리강령은 있는데 세밀하게, 누군가 피해를 얘기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응대 매뉴얼 자체가 없다”고 밝혔다.

▲ 조재범 성폭행사건 관련 SBS보도화면 갈무리.
▲ 조재범 성폭행사건 관련 SBS보도화면 갈무리.
매번 최우선 조치로 언급되는 ‘가해자 영구제명’은 말 뿐이란 지적도 나온다. 농구선수 출신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단 한번이라도 범행을 저지르면 영원히 격리시키는 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특히 개인경기의 경우 선수는 많고 국가대표는 바늘구멍이다. 코치나 감독이 시합에 내보내지 않으면 선수로서 길이 막힌다. 대부분 선수 생활한 사람들이 지도자로 가고, 지도자들은 전부 학연·지연으로 연결되는 세계”라고 밝혔다.

실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대한체조협회 고위간부 A씨는 본인 감사가 시작되자 사표 낸 뒤, 다시 고위직으로 복귀를 시도했다. 체조협회 복귀는 못했지만 지역 체조협회장을 맡아 논란이 됐다.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 함은주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협회 고위 임원으로 출마하려면 체조협회에서 동의를 해줘야 한다. 체조협회는 해당 사건이 있었음에도 동의를 해줬다. 법적으로는 어떠한 공식 징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뒤 “어쩌면 스포츠계는 굉장히 오래 ‘공위기간’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 근절) 정책은 시도도 못했다. 정책을 시도해봐야 어떤 게 부작용이 있는지 보완할텐데 그조차 못해봤다. 의지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선수생활을 이어갈 지원 조치도 필요하다. 성폭력 신고에 대한 신속한 조사, 법률조치와 심리상담 등 피해자 원스톱 지원 체계, 스포츠윤리센터 설립 등이 속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폭력 상담 및 지원 기관의 전문화가 요구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대한체육회가 상담 시스템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폭력·성폭력 사안 처리를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한다고 한다. 자칫 면피용으로 전락할까 우려된다. 전적으로 의뢰할 게 아니라 외부인사와 함께 시스템을 이뤄가야 한다”며 “국방부 성고충상담관 같은 시도를 보완하면서 적극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문가 토론을 들은 한 전직 스포츠 인권 강사는 실효성 있는 인권 교육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빙상연맹 지도자를 대상으로 노동권 문제를 얘기했더니 다음 교육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말 워크숍에서 ‘결국 애들은 다 맞으면서 훈련해야 실력이 오른다’고 말하는 인권강사를 본 경험이 있다며 체육계 내부의 인권 의식 수준을 비판했다.

그는 “교육 했을 때 한 번에 200~300명, 최대 1500명 대상으로 강의했다. 담당자로부터 학생 수가 많아야 실적 면에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다. 장사가 아니라 교육다운 교육을 하려면 어떻게 개선해나갈지 고민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체육계 성폭력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까지 언론이 ‘2차 가해’를 삼가야 한다는 요구도 다시 제기됐다.

정용철 교수는 ‘교수님이 알고 겪은 것 중 가장 센 걸 알려 달라’고 말했다는 기자 사례를 들었다. 그는 “피해자 대부분은 수많은 ‘2차 가해’ 때문에 내가 그때 말을 안 했으면 이런 고통을 안 받겠지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한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입을 다물면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가 또 생길 것이기에 입을 다물 수 없다고 한다”며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해결 방법을 어떻게 관철시킬지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아리 여성가족부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 점검단 점검관리팀장은 “2차피해 우려와 관련해 한국기자협회와 만든 언론보도 가이드라인을 활용해 달라.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보도는 구조적 문제 해결이 아닌 데 관심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라며 “홈페이지에서 언제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여가부에 연락 주시면 언제든 자료를 드리겠다”고 전했다.

한편 문체부는 이날 지난 9일 발표한 ‘체육계 성폭력 비위 근절대책’ 후속조치 일환으로 국가대표 선수 관리·운영 실태에 대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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