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만일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났다면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했을까. 국가정보원의 여론조작 사건이 미국 사회에서 발생했고 그 이후에도 정부가 나서서 덮으려고 권력 남용과 거짓말을 남발했다면 과연 대통령은 무사했을까. 

잘 알려졌다시피 닉슨 역시 도청 사건 때문만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도청 사건을 덮으려고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말을 일삼다가 그게 들통나자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사건은 권력을 얻기 위해 권력을 남용했고 그 이후 은폐 시도가 이어졌다는 측면에서 비슷했지만, 어느 사회에선 엄중하게 받아들여졌고 또 어떤 사회에선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됐다. 왜 그럴까. 필자는 공론장의 수준 탓이라고 본다. 공론장 수준이 높은 사회는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 지난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지난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저널리즘 역할도 중요하다. 사실을 확인하고 시시비비를 가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저널리즘의 역할이다. 저널리즘이 대개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 ‘불편부당’을 추구하는 이유 역시 정파적 입장에 서다보면 중요한 것을 중요치 않게, 혹은 중요치 않은 것을 중요하게 다룰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저널리즘은 중요한 사안이 공론장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하게끔 물타기를 시도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의 전력이나 인성 등을 문제 삼는 보도들이 대표적인 물타기 사례다.

공론장의 수준과 저널리즘의 역할을 다시 고민한 이유는 최근 논란이 일었던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 때문이다. 신 전 사무관은 청와대가 KT&G 사장 선임에 관여했고 불필요하게 적자국채를 발행해 채무 비율을 높이려 했다고 폭로했다. 

사안별로 보면 KT&G는 기재부가 최대주주인 중소기업은행이 국민연금에 이은 2대 주주로 정부가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이다. 신 전 사무관이 예를 든 LG사장 선임과는 비교할 수 없고 조선일보가 프레임으로 잡은 ‘청와대의 CJ 인사 개입은 유죄’와도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조선일보 1월2일자 보도 “‘정부의 KT&G 인사개입’이 가상한 일? 조원동은 ‘CJ 개입’에 징역형 받았는데”)

적자국채 발행 시도의 경우는 아직 논란이 남아있다. 청와대와 기재부 사이에 2017년 말 어떤 주장이 오고갔는지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아서다. 신 전 사무관이 주장한대로 정권 초 채무 비율을 올려 이전 정부의 책임으로 떠넘기려 했다는 의도가 사실일 수 있지만, 2017년 5월에 집권한 정부가 그해 책임을 이전 정부에 떠넘기려 했다는 주장이 무리한 것도 사실이다. 

국채 발행에 여러 목적이 있고, 이는 오히려 정부의 재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 전 사무관의 폭로가 일으킨 논란은 현 정부를 공격하거나 신 전 사무관을 비난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신 전 사무관은 그가 주장한 내용들을 입증할 만한 근거들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고 근거와 주장을 연결하는 논리도 다소 부족했다. 또한 정부를 공격하고자 하는 언론들이 부화뇌동할 좋은 소재를 던져줬다. 

그렇다고 그의 폭로가 의미 없을까. 그렇진 않다. 누구나 자기가 겪은 조직 내부의 일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자신의 행동이 누구에게든 알려질 수 있다는 정서가 만연해져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어느 조직에서든 개인은 보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무라면 더더욱 국민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논란은 우리의 공론장 수준을 가늠할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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