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원래 존재하는 천부인권이 아니다. 1970년대 서구에서 성적으로 억압돼있던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쟁취하려던 권리다. 자신의 신체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이들이 해방을 외칠 때 주장한 개념이다. 성매매나 성폭력 상황에서 약자(피해자)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폭력을 정당화하고 약자를 탓하는 또 하나의 억압이다.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를 유죄로 보기 위해서는 수행비서가 위력을 행사해 간음을 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즉 수행비서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데 이를 안 전 지사가 강제로 침해했다는 게 확실하게 드러나야 유죄라는 뜻이다.

공은 피해자에게 넘어간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상황을 충분히 듣고 피해자에게 ‘얼마나 거부의사를 밝혔는지’ 물었다.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았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지 않았으니 안 전 지사에게 죄를 묻기 어렵게 된다. 한겨레21 보도를 보면 1심 재판부는 심리전문위원에게 각종 자료를 의뢰하면서도 안 전 지사 쪽에 편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안 전 지사 측 변호인의 신원불명의 정신과 전문의 의견을 근거로 검찰이 의뢰한 심리분석가의 의견을 배척했다. 안 전 지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 지난해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해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남성 유력 정치인과 여성 수행비서가 ‘동등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다’는 전제 자체가 ‘위력에 의한 간음’을 애초에 성립할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두 성인 사이에 발생한 개인의 일탈로 축소시킨다. 안 전 지사 항소심에서는 이 전제를 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항소심 마지막 공판(9일)을 앞두고 전국 155개 시민단체로 구성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1심 재판부는 안희정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은 채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하며 “3차 공판에서는 (수행비서가 아닌) 안희정에게 질문해야 한다”며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시민들에게 ‘안희정에게 할 질문’을 받았다.

시민들이 보낸 질문 중 다수는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한 정황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피해자와 나눈 문자 내용 보니깐 답장이 몇 분만 늦어도 독촉을 하던데 그거 위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왜 출장지에서 부하직원 허리를 감쌉니까”, “정치인으로 자신의 수행비서의 업무 범위를 정확하게 어디까지로 상정하시나요” 등의 질문을 보냈다.

▲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지난해 11월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지난해 11월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수행비서가 얼마나 거부의사를 밝혔는지를 묻기 보단 안 전 지사가 제대로 동의를 받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시민들은 재판부가 안 전 지사에게 “동의를 받았습니까”, “위계 속에서 진정한 합의는 가능합니까”, “피해자가 머뭇거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 했습니까” 등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안 전 지사가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될 줄 알았고 입막음을 한 정황을 지적하는 질문도 있었다. 시민들은 “성폭력 아니라고 발뺌해서 비난받은 이후 페이스북으로 다 제 잘못이라며 사과한 이유가 뭔가요”, “사랑하는 사이였으면 왜 불러내 미투 분위기를 신경 썼습니까”, “‘괘념치 말라’ ‘잊으라’는 말은 대체 왜 했습니까”, “왜 텔레그램 지우라했죠” 등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검찰은 이 사건보다 명시적인 위력이 더 없는 사건도 대법원에서 유죄가 난 판례가 있다며 1심 재판부가 ‘위력’을 너무 좁게 행사했다는 입장이다. 오는 9일 마지막 공판에서는 검찰과 변호인 측이 안 전 지사를 신문하고 검찰 구형과 최후 진술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항소심에서 유죄로 결과가 뒤집힐지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최근 안 전 지사는 두 차례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면서 “비공개 법정 취지에 따라 말하기 어렵다”며 언론에 말을 아끼고 있다. 이번 사건의 선고 공판은 오는 2월1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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