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신문이 폐지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시대다. 따끈따끈하게 갓 나온 신문이 계란판 제조 공장으로 직행하는 현실은 종이신문의 추락한 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독자 눈에 들기 위한 신문사들의 ‘1면 전쟁’은 지금 이 시각에도 치열하다.

주영훈 조선일보 편집기자가 지난해 11월 펴낸 책 ‘23시30분 1면이 바뀐다’는 기사를 예술로 만드는 편집기자들의 이야기다. 주 기자는 1999년 한국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해 2002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2006년부터 1면 편집을 맡았다. 그는 “10년 넘게 새벽 야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불규칙적인 수면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소화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선일보 1면’하면 어떤 기사가 떠오르는가. 기자는 2016년 11월7일자가 먼저 떠오른다. 박근혜 정권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 후배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웃음을 보이던 그 사진 말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수면 위로 드러났던 그때 조선일보 1면은 파문을 일으켰고 ‘거만한 우병우’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 조선일보 2016년 11월7일자 1면.
▲ 조선일보 2016년 11월7일자 1면.

물론 이날 1면의 수훈갑은 검찰청사 밖 300m에서 찰나를 포착한 고운호 사진기자지만, 특종 사진을 독자들이 보기 좋게 다듬고 배치하는 일은 편집부서 몫이다. 주 기자는 책에서 “특종 사진을 받아 든 편집자의 역할은 오직 하나, 지면에서 사진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기사도 제목도 기꺼이 희생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당초 51판 1면 사진은 검찰에 출석한 우 전 수석이 취재 기자를 꼬나본 사진이었다. 52판(전국 주요 지역에 배달되는 ‘본판’으로 보통 오후 11시30분 완성되며 53판부터 ‘야근판’이다. 앞자리 5라는 숫자는 편의상 붙인 것이고 뒤의 1, 2, 3, 4가 순서를 나타낸다)부터 ‘우병우 팔짱 사진’이 배치됐다.

 

이날 1면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일보 편집자들은 ①어둡고 거친 원본 사진에서 표정을 최대한 살렸고 ②사진을 사실상의 1면 톱으로 올렸으며 ③검찰 수사 기사의 제목을 사진에서 뽑았다. 보통 제목은 기사 내용에서 뽑지만 이날은 사진이 기사를 압도했다.

조선일보가 탄핵 국면에서 박근혜 캐리커처로 독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단 사실도 흥미롭다. 2016년 11월21일자 1면에는 “‘최순실과 공범’… 憲政(헌정) 첫 피의자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캐리커처 사진이 실렸다. 

 

▲ 조선일보 2016년 11월21일자 1면.
▲ 조선일보 2016년 11월21일자 1면.

주 기자는 “며칠째 계속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이 메인 사진으로 나갔던 터라 이번에는 캐리커처로 차별화해보자며 쓴 그림”이라며 “박 전 대통령의 굳어 있는 표정을 흑백의 붓 터치로 세밀하게 살리다보니 보기에 따라서는 험상궂은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 다음날 독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보수 언론이란 데서 대통령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느냐.” “범죄자 몽타주 같다.” “잘못은 했지만 국가원수인데 이렇게 욕보여도 되느냐.” “조선일보가 다른 이득을 보려고 이러는 거냐.” 비판이 대다수였다.

 

책에선 종이신문 위축에 따른 편집기자들의 깊어지는 고민도 읽어낼 수 있다. 저자 표현을 빌리면 ‘그날의 사진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는’ 편집기자들은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속보에 노심초사한다. 

 

“대동소이한 기사들이 하루에도 수천 건씩 쏟아지는 현실에서 신문은 어떻게 독자를 놀라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들은 신문이 매일 특종을 할 수 없기에 필요한 자원들이다. 상시적 과로에 시달린다. 

문제는 조선일보 1면, 아니 신문 1면의 영향력이 과거와 같진 않다는 데 있다. 종이신문은 폐지 취급을 받으며 계란판 제조 공정으로 향한다. 주 기자는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주영훈 조선일보 편집기자가 쓴 책 ‘23시30분 1면이 바뀐다’.
▲ 주영훈 조선일보 편집기자가 쓴 책 ‘23시30분 1면이 바뀐다’.

“‘신문에 미래가 있을까’ 불안하다면, ‘다른 일을 택해야 했는데’ 회의가 든다면 자신이 만드는 신문이 인쇄되고 있는 곳을 한번 찾아가보길 바란다. 가서 종이의 가능성을, 인쇄의 무거움과 자신의 가벼움을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하여 매일 보던 신문이 다르게 보이고 지면에 박힌 헤드라인이 실제보다 커 보인다면, 그 야성으로 다시 편집국에 돌아와 뉴스의 가치와 편집의 메시지를 고민해보길 바란다.”

 

 

조선일보가 ‘1등 신문’ 지위를 갖는 여러 요인 가운데 ‘52판’이 있을지 모른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판갈이에 조선일보 독자들은 다른 신문에서 볼 수 없는 최신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시대 속에서 조선일보의 52판은 계속될 수 있을까. 지난해 3월 조선일보 노조는 “51판과 52판을 통합하고 심야 판갈이를 중단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가판을 완성도 높게 만들고 일부 지면만 51판에 최종 수정하면 강판 횟수도 줄고 야근 인력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책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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