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역사는 꽤 오래된 것 같지만, 실제로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진 건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교육부 산하에 있다가 2000년 공사 창립을 했지만, 수능 방송 채널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이 프로그램이 월등한 것도 아니었다. 2007년 EBS는 교육방송에서 지식채널로 채널 브랜딩을 새롭게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건 김유열 편성기획부장이었다. 기자로서 그를 처음 만난 건 이때였다.
그는 앞서 ‘노자와 21세기’라는 프로그램으로 도올을 TV에 데뷔시키며 EBS를 유례없는 인기 반열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이후 편성기획부장으로 부임한 뒤 그는 파격적인 편성 전략을 취했다.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매일 방송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양평에 한 리조트에 PD들을 합숙시키며 아이디어를 내게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프라임 타임대 프로그램 70%를 폐지한다는 방침에 EBS 안팎의 반발이 거셌다.
그는 이번에 낸 책 ‘딜리트’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국내 방송이 잘하지 못하는 것, 잘할 생각도 없는 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틈새요, 빈 곳이었다. 어린이의 프로그램을 획기적으로 확대한 것도 같은 이치였다. 남들이 소외시키는 것에 우리의 답이 있었다. EBS는 여기서 기회를 발견했다. 최고의 어린이 방송을 하겠다는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던 것처럼 최고의 다큐 방송도 무망한 것은 아니었다. 딜리트 전략의 핵심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p.319)
지상파 입장에서 보면 EBS의 이런 시도와 성취는 어쩌면 작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EBS가 가져온 지난 10년간 써내려 온 역사가 증명하는 의미는 그리 작지 않다.
2019년은 한국 지상파 방송사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종편의 시사-보도-예능-드라마를 맞서야 하는 백가쟁명의 시대, 100만 구독자가 넘는 크리에이터가 즐비한 유튜브 춘추전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넷플릭스 파상 공세에 맞서는 지상파-SKT 연합군이 만들어졌지만, 이 모든 공세를 다 일일이 대응하는 게 답일까. 이럴 때 지상파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답은 ‘딜리트’에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