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은 말한다. “이귀(李貴)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말에 법도가 없어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런데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걱정했기 때문에 뭇사람의 비방을 피하지 않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었다. 이 때문에 충성심만은 그에게 견줄 자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고관들에게 거리낌 없이 욕설을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고, 상소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임금은 그의 말을 써 주지 않았다. 국사의 어려움을 해결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지만 한낱 고될 뿐 도움된 것이 없었다.(원문 초략 번역)” 인조실록 인조 3년(1625) 3월25일자 사관의 논평이다.

사관의 기록은 사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를 보면 이귀는 자신보다 높은 정승들에게 화를 참지 못해 욕설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상소를 너무 많이 해서 상소질 잘하는 이귀라는 뜻의 소귀(疏貴)·소마(疏魔) 등의 별명을 가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관이 없는 사실을 적은 것은 아닌 셈이다. 이런 성격 때문일까. 이귀는 이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종1품의 좌찬성까지 올랐지만 끝내 정1품의 벼슬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 이귀 초상화. 이귀의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묵재(墨齋)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고,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이후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서 반정대장 김류, 최명길, 신경진 등과 함께 능양군을 추대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켰고, 김류와 함께 원훈(元勳)으로서 인조대 정국을 이끌어 갔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 이귀 초상화. 이귀의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묵재(墨齋)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고,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이후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서 반정대장 김류, 최명길, 신경진 등과 함께 능양군을 추대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켰고, 김류와 함께 원훈(元勳)으로서 인조대 정국을 이끌어 갔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광해군 때 재야에 있었던 서인이 능양군(인조)을 추대해 반정을 일으켰다. 당연히 집권 세력은 서인이었지만, 반정 초기 조정에는 남인과 북인도 적게나마 존재할 수 있었다. 서인들은 민심 수습을 위해 북인 모두를 처단할 수 없었다. 광해군의 몰락을 가져온 대북의 전횡을 거울삼았기 때문이다. 북인과 남인 중에서 큰 흠이 없으면서 뛰어난 재능과 명망이 있는 인물들은 국왕 인조와 공신계 서인 공서(功西)에 의해 등용됐다. 그렇다고 해서 남인과 북인들이 서인과 동등할 만큼의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인사권을 가진 집권 서인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만 허용했기 때문이다.

북인을 달가워하지 않는 서인들도 많았다. 김상헌을 대표로 하는 명분론자들인 청서(淸西)이다. 이귀는 행적으로 보면 공서지만 북인에 대해서는 청서 입장이었다. 이들은 북인을 등용하자는 공서와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그와 자주 얼굴을 붉힌 인사가 바로 김류(金瑬)이다. 나이로는 김류가 14살 어렸지만, 둘은 함께 반정을 주도하고서 모두 1등 공신이 됐을 만큼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 하지만 반정 이후 인사권 장악이라는 정국주도권을 두고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류가 이조판서가 되어 북인계 남이공(南以恭)을 대사간에 추천하자 인조는 김류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임명했다. 이후 김류와 이귀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오죽했으면 둘 사이를 빗대 ‘유구국(琉球國)이 화합하지 못한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는 두 사람 이름의 발음을 빗댄 우스꽝스런 표현이었다. 게다가 이귀는 우의정 신흠을 공적인 자리에서 모욕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가 김류와 같은 노선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사헌부의 관리들도 이귀를 탄핵하지 못했는데 반정 1등 공신으로서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 연말과 새해 벽두부터 정치권이 시끄럽다. 국정 현안에 대해서 토론과 타협을 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당연한 과정지만 우리는 그것 보단 인신공격과 막말이 난무하는 국회를 TV나 각종 SNS를 통해 보고 있다. 근거 없는 막말엔 여야가 없는 것 같다. 여든을 바라보는 박지원 의원도 한다는 SNS를 비난의 도구 보다는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대자보로 활용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지만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임금에게 상소했던 잡군자 이귀가 그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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