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적자국채 발행 외압 의혹을 제기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3일 자살 소동을 벌였다. 그는 이날 유서를 남기고 잠적했다가 4시간 만에 경찰에 발견됐다. 한 모텔에서 목에 찰과상을 입은 채였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동안 신 전 사무관 주장과 폭로를 받아쓰기 바빴던 언론들은 이날도 각종 ‘속보’와 ‘단독’을 쏟았다. 4일자 사설 가운데 한겨레가 눈에 띄었다.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의 무분별한 의혹 부풀리기를 비판했다. 사실 관계도 따졌다. 사설 제목은 “‘신재민 폭로’ 침소봉대하는 한국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먼저 따져본 건 ①“2017년 11월 대규모 초과 세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가 채무 비율을 높이려고 청와대가 기재부에 적자국채 추가 발행 압력을 넣었다”는 신씨의 주장.

한겨레는 “당시 15조원 규모의 초과 세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바이백(국채 매입)이 일시적으로 취소되고 적자국채 추가 발행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4조원 규모의 적자국채를 추가 발행했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38.3%에서 38.5%로 0.2%P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늘어나는 국가채무 비율이 의미 있는 수치가 아니란 거다.

또 2017년 국가채무 비율은 그해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정부가 아닌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국가채무 비율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한겨레 4일자 사설.
▲ 한겨레 4일자 사설.
②적자국채 추가 발행 의견을 냈던 청와대와 이에 부정적이었던 기재부 실무진 간 갈등도 쟁점이다.

한겨레는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을 지는 청와대가 중요한 정책 결정과 관련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분명한 근거 없이 외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결국 기재부 의견대로 적자국채 추가 발행을 하지 않은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했다. 국채 발행은 청와대가 권한을 갖고 결정할 수 있는 조치라는 것이다.

③“초과 세수 상황에서 이자 비용이 들어가는 적자국채 발행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한겨레는 “초과 세수가 발생했다고 반드시 국채를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채 상환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금이 생긴다고 무조건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듯 “필요한 지출을 하거나 투자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영철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도 “신 전 사무관이 기본적으로 ‘이자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국가 채무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논리뿐”이라며 “초과 세수가 발생하면 무조건 국채 발행을 줄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고려 사항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2일자 사설에서 “전 정권 먹칠용으로 적자국채를 발행하려 했다면 국정 농단이 따로 없다”고 청와대를 비판했는데 한겨레는 “사실관계에 관한 정확한 검증이 없는 무책임한 비판”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 사설을 다시 한 번 복기한 까닭은 언론 관심이 ‘사건 중계’에 쏠렸다는 데 있다.

‘내부고발자 보호’ 강조 언론

신 전 사무관 말을 빌려 의혹과 논란을 부풀리는 데 주력했던 보수 언론과 경제지가 여전히 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단 의심은 지우기 어렵다.

매일경제는 4일치 1면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신재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신씨 폭로 내용에 대한 타당성을 떠나 내부고발자를 향한 도를 넘은 마녀사냥은 선량한 공익 제보 관행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의 성역으로 간주하는 선민의식은 폭로를 계기로 출범한 현 정부의 자기모순이자 건전한 시민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 매일경제 4일자 1면.
▲ 매일경제 4일자 1면.
조선일보도 같은 날 1면에서 “여당이 신 전 사무관의 고발 동기를 거론하며 비난하거나 인신공격하는 건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한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 발언을 인용 보도했다. 세계일보도 사설에서 ‘내부고발자 보호’를 강조하며 “민주당이 집권한 뒤에는 내부고발자를 배신자로 폄훼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사건은 ‘균형 재정’ 논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김도년 중앙일보 경제정책팀 기자는 3일 칼럼에서 “적자국채 발행 논쟁이 있던 2017년 말 기재부 실무진이 청와대 의견을 덥석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며 “단기적인 경기 부양, 포퓰리즘적 복지 확충을 위해 얼마든지 빚을 내도 된다는 ‘기회주의적 재정 운용’ 행태는 더욱 만연해졌을 공산이 크다”고 썼다.

김 기자는 “‘빚’은 미래 세대에 부담을 준다는 측면에서 가능하면 줄이는 게 좋다”며 “이번 사태에서 확인한 정부는 알뜰살뜰 살림을 챙기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그게 신 전 사무관이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 아닐까”라고 했다.

▲ 중앙일보 3일자 29면 오피니언.
▲ 중앙일보 3일자 29면 오피니언.
이에 반해 성현석 프레시안 기자는 2일 기사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소득주도성장 등 막대한 재정이 요구되는 경제 정책을 위해 증세나 국채 발행이 필요했음에도 “국채 추가 발행은 이뤄지지 않았고, 현 정부 역시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긴축 재정을 했다”고 지적했다.

성 기자는 “재정 관료들은 정부가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하기(재정을 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청와대 참모들 역시 이런 관료들과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초과 세수로 국채를 매입했다고(나라 빚을 갚았다고) 자랑했다. 사실상 신 전 사무관의 프레임을 지지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