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언론이 신년호에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기사를 쏟아냈다. 한겨레는 100년 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을 담은 기사를 1일에 이어 2일자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이미 지난해부터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이란 문패를 달고 23차례나 기획기사를 써왔다. 동아일보는 2일자 6면에 24번째 기획기사를 이어가면서 올 해부턴 주 2회로 늘려 연재하겠다고 했다.

3·1운동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 자본이 조선에 식민지 공업정책을 펴자 이 땅에도 노동자계층이 일정하게 성장했다. 당시 조선의 공장노동자는 1911년 1만2000명에서 1919년 4만1000명으로 늘었다. 여기에 광산, 토목건설, 운수노동자까지 덧붙이면 15만명 정도로 불었다.

1910~1917년 한해 고작 7~8건이던 노동쟁의는 1918년 50건으로 급증하고 파업 노동자도 4443명으로 늘었다. 그 힘이 3·1운동을 낳았다.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시작은 지식인들이 주도했지만 거리의 폭발적 항쟁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해 1919년 8월에 정점에 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만 84건 8500명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가장 먼저 만세시위에 합류한 이들은 용산인쇄소 노동자들이었다. 용산인쇄소는 용산전자상가 앞 원효로2가 사거리에서 있는 용문시장에 있었다. 용산인쇄소는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각종 문서와 책자를 생산하는 공기업이었다.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명은 1919년 3월8일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거리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헌병대에 19명이 연행됐다.

▲ 일제때 용산인쇄국 전경. 사진=제국의억압과저항의사회사
▲ 일제때 용산인쇄국 전경. 사진=제국의억압과저항의사회사

다음날 아침 경성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명은 파업과 동시에 만세시위에 나섰다. 동아연초공장은 종묘 옆 종로4가 사거리에 있었다. 동아연초도 조선총독부 직영 전매품인 담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이 역시 공기업이었다. 이날엔 전차 기관사와 차장들도 파업에 나섰다.

지식인들 만세시위는 금세 시들었다. 3월 초중순 대부분의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자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관순 열사도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4월2일 아우내 장터에서 연행됐다. 빈 공간을 채운 노동자들이 만세시위를 7월까지 끌고 나간 끝에 전국적 항쟁으로 만들어냈다.

1919년 노동자 투쟁은 1919년 7~8월 최고조에 달했다. 8월 한 달에만 경성에서 26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특히 8월18일 경성전기 파업은 경성시내를 암흑천지로 만들고 전차운행까지 중단시키는 위력을 떨쳤다.

▲ 용산인쇄국 자리에 들어선 KT원효지사. 사진=독립기념관
▲ 용산인쇄국 자리에 들어선 KT원효지사. 사진=독립기념관

조선의 노동자 농민이 거리에서 뜨거운 봄과 여름을 보내던 1919년 8월 대한제국의 외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낸 ‘을사 5적’ 이하영은 서울 용산구 원료로 1가에 대륙고무(주)를 세워 친일관료에서 기업가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대륙고무는 한국 최초 고무공장으로 검정고무신을 생산했다. 이 회사 주주들은 고종의 부마 박영효, 윤치호, 윤치소, 박중양 등 개화파에서 변질한 친일관료들이었다.

만세시위 기운이 한풀 꺾인 1919년 10월 인촌 김성수는 영등포역 앞에 경성방직(주)을 세우고 박영효를 초대 사장으로 앉혔다. 경성방직은 이후 경방필백화점을 거쳐 지금은 신세계백화정 영등포점이 됐다.

▲ 1920년 3월9일자로 발행된 조선일보 지령 3호 1면
▲ 1920년 3월9일자로 발행된 조선일보 지령 3호 1면

만세시위 덕분에 총독부는 이듬해 봄 3대 민간신문 조선·동아·시사신문을 허가했다. 시위 군중의 힘으로 탄생한 조선·동아일보도 내년이면 100년을 맞이한다. 모쪼록 100년 가는 언론을 일궈온 두 신문이 자신들 출생의 근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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