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 마지막 주나 1월 첫 주에 칼럼 기고의 청탁이 올 때면 예상되는 글감이 있다. 바로 ‘올해의 전망’이다. 편집자로서는 당연한 기획이고, 기고자에게는 익숙한 주제다. 연말연시면 거의 모든 매체에서 올해의 전망을 다룬다. 대통령부터 각 언론사 논설주간까지 ‘신년사’를 밝히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결산’이나 전망’을 내놓는다. 내게도 역시 같은 글감이 주어졌다. 아마도 2019년 미디어 전망일 듯싶다.

그런데 올해는 이 글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꼭 기고문이 아니더라도 회사에서는 올해의 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하다못해 페이스북에는 사적인 신년 다짐을 적는데도 말이다. 국어사전에서 전망의 뜻을 찾아보니 이렇다. “앞날을 헤아려 내다봄. 또는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이 전망이라고 한다.

고민에 빠졌다. 앞날이나 장래의 상황을 어떻게 헤아리고 내다본다는 말인가. 도박과 같은 예언이 아니라면 무책임한 예상이나 호언장담이 되기 쉬운 것이 바로 전망이다. 그래도 굳이 전망의 근거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과거와 경험에 있다. 수치와 지표에 대한 전망은 과거에 누적된 데이터를 통해 추론된다. 용하다는 점쟁이도 상담자의 과거에 대한 확인으로 신뢰를 얻은 후 운세를 내놓는다.

그러나 전망이 꼭 이렇게 분명한 과거와 경험의 파편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전망은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일관성 있게 연장되는가로부터 동의를 얻는다.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한 일간지의 고문은 올해의 전망을 ‘한미관계’에서 바라보았다. 지금의 남북미 관계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2020년 이후 주한미군과 동맹이 퇴색할 때 대한민국의 향방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예측의 타당성이 아니라 냉전과 분단이라는 과거가 올해를 헤아리고 내다보는 망원경인 셈이다.

▲ 조선일보 1월1일자 김대중 칼럼
▲ 조선일보 1월1일자 김대중 칼럼

 

 

과거의 연장을 통한 전망을 그저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만의 관점이라 볼 수는 없다. 한 겨울 광장의 촛불이 꺼지지 않았던 2017년 초나 정권교체 이후 2018년의 전망 또한 보수정권 9년 동안 잃어버린 희망의 회복이 전망의 시야를 규정했다. 작년보다 더 나은 올해란 지난 세월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의 규명과 마땅히 주어졌어야 할 권리의 회복을 뜻했고, 이는 ‘정상화’나 ‘적폐 청산’이라는 단어로 요약되었다. 설령 새로운 요구와 제안이 나왔을 때도 이는 과거에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실패했던 것들의 복귀인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전망은 희망의 또 다른 말이다. 전망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전망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은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희망의 구체적인 실현마저 과거에 묶여있을 때 나타난다. 희망의 성취가 대통령과 같은 권력의 중심만을 향할 때 더욱 그렇다.

전망의 시야를 좌우하는 과거의 힘은 낡은 프레임이나 이루지 못했던 희망의 목록만이 아니다. 희망을 실현하려 했던 과거의 방식이 그대로 일 때, 오래 전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했던 “희망을 배우는 일”을 미루었을 때, 희망은 그저 진통제 이상의 처방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요청받는 올해의 전망은 간 데 없고 전망을 쓰지 못하는 핑계만 둘러댄 셈이 되었다. 하지만 올해의 전망을 내놓지 못하는 핑계를 생각한다면 또 다른 전망을 말할 수는 있을 듯하다. 여전히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희망이 과연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이 그것이다. 물론 이 전망은 이미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닫힌 과거에서 우리가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이다. 다시 블로흐의 말을 인용해 보자.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