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들은 그동안 ‘얼마 줄게’ 말 한 마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내일부터 나오지마’ 한 마디로 해고되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 그러나 서면계약이 확산되는 반가움도 잠시, 서면계약서가 ‘쉬운 해고’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계약 없는 노동이 일상화한 방송작가들을 위해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지 1년이 지났다. 무계약 관행에 변화가 시작된 이면에 ‘갑’인 방송사가 유리하게 변형한 계약서로 오히려 작가들이 불이익을 겪고 있다는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이미지, 방송작가유니온)는 27일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주년 토론회–김작가에게 무슨 일이?’를 열고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이후 명과 암을 진단했다.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이철희 의원, 바른미래당 이상돈 의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공동 주최했다.

▲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주년 토론회가 27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주년 토론회가 27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는 지난해 12월28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마련한 계약서 표준안으로 ‘방송원고의 집필 및 사용’을 중심으로 한 권리관계에 방점을 뒀다. 원고료 금액과 지급 시기, 부당한 계약 취소 및 원고 인도 거부 금지, 저작권, 귀책사유에 따른 손해배상의무, 이의·분쟁 발생 시 해결 절차 등을 명시해 계약상 ‘을’인 작가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문제는 이름처럼 방송작가 ‘노동권’이 아닌 ‘저작권’에 치우친 표준계약서가 포괄하지 못하는 방송작가들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방송사에서 상근하며 주 50시간 이상 과도한 노동에 노출되거나,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며 기자·PD 및 보직자들 지휘 받고 일하는 방송작가들의 경우 ‘집필물’ 자체가 없다.

방송사가 계약서를 통해 방송작가들 노동자성을 오히려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3개 방송사 계약서 문구를 보면 방송작가는 ‘자유직업 소득자’,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 ‘자유직업 소득자(프리랜서)로서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등으로 명시돼 있다.

‘당사자 간 협의를 통해 수정, 추가,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이 방송작가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사례들도 발생했다. 임경빈 방송작가유니온 정책국장은 “방송업계 불공정 관행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면계약 체결이 이뤄져 일부 방송사들이 합법적 해고 수단으로 악용하거나 독소조항을 넣은 자체 계약 체결을 강요한다”고 전했다.

실제 SBS 시사보도 프로그램 ‘뉴스토리’ 작가 해고 사태가 대표 사례다. 뉴스토리 작가들은 계약기간을 1월29일~3월30일까지로 적시한 계약서를 체결, SBS는 이를 근거로 3월에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약정한 집필 횟수가 남아 있을 경우 당사자 상호 합의 하에 계약기간을 변경 할 수 있다’는 표준계약서 조항을 ‘즉시 종료’로 수정한 결과였다.

당시 작가 중 한 명인 도미라 방송작가유니온 계약서TF팀장은 이날 “해고된 작가들은 돌아가지도 못했고 사과도 못받았다. 충격 받은 신입작가들도 다 같이 그만두고 아직 방송을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다른 지상파 방송사들은 표준 집필계약서를 그대로 따르는 선순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계약서를 썼는데도 하루 만에 해고됐다. 방송 당일 다른 작가에게 해고됐다는 걸 들었다는 연락들을 받았다”고 밝혔다.

도미라 팀장은 “(부당해고 이후) 소송을 하라는 방송사를 대상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싸움을 할 작가가 어디 있겠나. 표준계약서를 방송사가 임의로 변형하거나 수정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 ⓒ 방송작가유니온
▲ ⓒ 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유니온은 △‘갑’ 혹은 ‘을’ 의사표시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계약 체결 2달 만에 방송작가에게 계약해지통보를 한 MBC 보도시사프로그램 △‘구성력’, ‘질병 등의 사유’,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등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요소로 해고가 가능하도록 한 TBN교통방송 등을 이른바 ‘변칙 계약서’ 부당 활용 사례로 밝혔다.

이밖에 △‘신입작가’ 등 근로계약서 체결 대상에 도급계약서나 업무위탁계약서 활용 △작가나 스태프 등에게 과도하게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계약내용 변형 △방송종사자 보호 조항 일방적으로 삭제 △저작권을 무조건 방송사나 제작사에 귀속되도록 변형 △방송작가에게 본연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까지 떠넘기는 방식으로 변형 등 문제가 지적됐다.

방송작가들 “적절한 계약기간은 2년…노동권 보호돼야”

절대 ‘을’일 수밖에 없는 방송작가는 계약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거나, 부당한 조항 수정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지적됐다. 실제 방송작가유니온이 지난 19~23일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비조합원 방송작가 200여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표준계약서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 과반인 59.7%가 표준계약서 내용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67.5%는 여전히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고 밝힌 가운데, 계약서를 체결한 작가 중에서도 문체부 집필 표준계약서를 체결한 경우는 31.2%에 불과했다. 약 70%는 방송사가 자의로 수정한 계약서를 체결했다.

집필 계약서 상 적당한 계약기간으로는 ‘기간제법에 따른 2년’(30.6%)이라고 답한 응답자 비중이 가장 높았다. ‘1년’(30.6%), ‘프로그램 폐지 시’(19.4%) 등이 뒤를 이었다. 계약서에 필수로 담겨야 할 내용으로는 ‘4대보험/연차/휴가 등 노동권 보호 조항’이 72.8%로 1위, ‘저작권/재방료 등 창작물 권리 강화 조항’이 51%로 2위, ‘위약금 지급 명시 등 계약 파기 방지조항’이 50.5%로 3위에 올랐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는 근본적으로 방송노동시장에서 ‘소모품’으로 여겨진 방송작가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왜 방송사 PD에게는 다른 프로그램이 연속으로 맡겨지고 작가는 그렇지 못한가. 왜 PD에게는 실패할 자유가 보장되면서도 작가에게는 계약해지와 해고가 이뤄져야 하는가”라며 “PD와 작가가 동등한 지위와 처우를 보장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비대칭 고용과 노동조건에서 과연 방송사PD 역량이 얼마나 제고될지 방송사 스스로 답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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