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미래학자이자 작가인 로버트 융크는 1977년 ‘원자력 제국’이란 책에서 핵발전에 내재된 억압과 폭력성을 비판했다. 그는 핵발전이 단순 환경파괴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고 비밀주의와 담합이 일상화된 국가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 책이 나온 지 40년이 넘었지만, 한수원 납품 비리와 핵산업계 각종 스캔들을 생각하면 그의 분석은 한국 사회에 놀랍게 들어맞는다. 융크는 이런 모습을 ‘제국’에 비유해 ‘원자력 제국(Der Atomstaat)’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그가 비판했던 원자력 제국은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장 독일만 하더라도 2002년 원자력법 개정으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금지됐다. 서유럽 국가 대부분은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포기했다. 그나마 야심차게 추진한 핀란드 올킬루오토 핵발전소 3호기는 공사 지연과 규제 강화로 건설사였던 프랑스 아레바를 사실상 파산상태로 내몰았다. 결국 아레바는 올 1월 핵발전 사업을 프랑스 전력공사(EDF)에 넘기고 핵연료기업 오라노(Orano)로 이름을 바꾸고 사업을 축소했다. 일본에선 웨스팅하우스 파산으로 모회사 도시바가 휘청거렸다. 결국 도시바는 미국과 영국의 핵발전소 건설계획을 모두 포기했다. 미쓰비시도 터키에서 핵발전소 4기 건설을 수주했으나, 안전 비용 급증 등을 이유로 사업을 포기했다. 말 그대로 원자력 제국이 몰락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하지만 국내에는 ‘원자력 제국의 역습’이 진행 중이다. 핵산업계는 올해 조직정비와 기자회견, 각종 언론기고 등으로 어느 때보다 적극 활동을 펴고 있다. 사상 처음 광화문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특히 올해는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과 손잡고 정부 에너지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 수위를 점차 높여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가짜뉴스와 침소봉대형 뉴스가 난무하고 있다.

이미 수 많은 언론이 지적한 ‘태양광 패널 중금속 오염’ 문제가 대표적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내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뤄지지 않는 카드뮴 태양광 패널을 마치 국내 문제인 것처럼 발언하면서 재생에너지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핵발전 옹호단체가 환경단체로 둔갑하는가 하면, 일부 원자력계 인사는 태양광 전문가로 변신(!)해 이런 발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대만 국민투표를 둘러싼 해석도 마찬가지다. 대만 국민투표 결과는 2025년까지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시키기로 한 전기사업법 조항을 없애는 것이었다. 투표결과 전기사업법 조항은 사라지게 됐지만, 대만 정부는 에너지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수차례 확인했다. 그럼에도 찬핵진영은 대만이 탈원전 정책을 포기했다거나 우리도 대만처럼 탈원전 국민투표를 하자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유포시켰다. 우리 헌법에는 국민투표는 외교·국방·통일 등 국가 안보 사안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국회의원까지 나서 탈원전 국민투표를 하자는 상황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나라의 에너지정책은 밀실에서 결정됐다. 소수의 관료와 전문가가 정책을 결정·집행해왔고,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정보 제공과 사회적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국민투표와 주민투표 같은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도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제대로 된 정보 제공과 법·제도 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치 공세와 가짜정보 홍수 속에선 제대로 된 토론이 불가능하다. 탈핵 논쟁으로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던 2018년이 끝나간다. 2019년엔 가짜뉴스 팩트체크 그만하고, 서로의 주장이 맞붙는 토론을 하고 싶다. 2019년 기해년 새해엔 꼭 소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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