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편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송법 조항이 만들어진 지 31년. 이 법 4조2항은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해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 위반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게 된다는 처벌 조항(제105조)도 있지만 오랜 세월 처벌 사례는 없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무소속 의원은 지난 14일 이 조항 위반 이유로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오연수 판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부당하게 KBS 보도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항소했지만 1심 판결 의미는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의 구조 난항을 비판한 KBS 보도를 직접 통제하려 했던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 판결’의 씨앗이자 거름이 됐다. 판결문을 세세하게 다시 살폈다.
[관련기사 : “대통령이 KBS 봤다, 국장님 나 좀 살려주쇼”]
그러나 김시곤 전 국장은 지난 17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당시 통화에 대해 “느끼기에 ‘내가 너 하나 날리는 건 일도 아니다’라는 식의 통화였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걸 과시했고 우월적 지위에 있음을 힘줘 말했다. 결국 ‘보도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방송 독립이 무너진다면
이번 판결의 핵심이자 쟁점은 방송 편성의 자유를 보장한 방송법 4조2항이었다. 오 판사는 다음과 같이 이 조항을 매우 무겁게 봤다.
“이 조항이 궁극적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방송의 자유 즉 방송의 독립성 및 공정성이 가지는 중대성과 이것이 무너졌을 경우 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강한 부정적 파급력을 고려할 때, 이 사건 조항 위반의 처벌 규정(105조)은 방송 편성에 개입하려는 시도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 방송 편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간섭이 있는 경우에는 이 사건 조항을 위반한 범죄가 성립한다.”
이 의원 측은 재판에서 “단순한 의견 개진이었을 뿐 결과를 강요하는 등으로 방송 편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었고, 영향을 미칠 만한 지위나 관계도 아니었다”거나 “피고인(이정현) 행위로 인해 실제 방송 편성에 영향이 없었던 이상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오 판사는 이 의원의 통화가 실제 KBS 보도에 영향을 줬는지 여부는 쟁점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보도 통제를 시도한 통화 행위, 그 자체가 ‘권력의 부당한 간섭’이었다는 것.
오 판사는 청와대와 KBS의 권력 관계도 강조했다. “대통령은 KBS 사장의 임면권자다. KBS 사장은 보도국장 등 소속 임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다. 그렇다면 보도국장인 김시곤은 청와대 홍보수석인 이정현의 요구가 자신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피고인(이정현)은 김시곤 결정에 영향을 미칠 만한 지위 또는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두 사람 통화 음성은 2년이 지난 2016년 6월 언론노조가 공개했다. 파장은 컸다. 박근혜 청와대의 ‘신 보도지침’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 의원에 대한 조롱도 쏟아졌다. 일부 누리꾼들은 이 의원의 속사포 화법에 힙합 음악을 입혀 ‘MC 정현’이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실제 이 의원은 김시곤 전 국장이 입도 제대로 못 뗄 만큼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이 화법은 ‘독’이 됐다.
오 판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2014년 4월21일 통화의 경우 피고인(이정현)은 수차례 언성을 높이고 비속어도 거침없이 사용하는 등 통화 때 피고인이 사용하는 용어, 목소리 크기, 말투, 억양 등을 봐도 상대방에게 반복적으로 강요하거나 거칠게 항의와 불만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곤이 ‘아니, 이게, 아니’, ‘아니, 이 선배’, ‘아니’, ‘아,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등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해도 피고인은 이를 듣지 않고 큰소리로 자신의 말만 계속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전화를 건 시기, 통화 내용, 통화 때 사용한 용어, 목소리의 크기, 말투, 어조 등 앞서 본 사정들에 비춰 피고인 행위는 단순히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기 어렵고, 해경 비판을 자제해 달라, 보도물을 다른 것으로 바꿔 달라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강하게 요구해 방송되는 사항의 종류, 내용, 분량 등에 관한 상대방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브리핑하거나 보도·해명 자료를 내는 등 공식적이고 정상적 방법을 택하지 않고 방송이 나가자마자 즉시 방송국의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하고 방송 내용의 변경을 요구한 행위는 정당한 공보 활동으로 볼 수 없다고도 판시했다.
이 의원이 설령 KBS의 비판 보도로 인해 해경이 구조 작업에 소홀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염려했다거나 방송 내용이 명백히 오보라고 판단해서 한 행위라고 해도 위법성이 조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 판사는 스스로 이번 판결에 대해 “아직 한 번도 적용된 적 없는 이 사건 방송법 위반 처벌 조항의 적용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별 경각심 없이 행사돼 왔던 정치 권력의 언론 간섭이 더 이상은 허용돼선 안 된다는 선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양형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시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전제다. 언론 중에서도 방송이 국민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국가 권력을 비롯한 특정 권력이 방송 편성에 개입해 자신들의 주장과 경향성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여론화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면, 국민 의사가 왜곡되고 우리 사회의 불신과 갈등이 증폭돼 민주주의에 중대한 위해가 발생하게 된다.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외부 세력, 특히 국가 권력의 방송 간섭은 엄격히 제한돼야 한다.”
지난 31년 동안 이 법에 의한 기소와 처벌이 전무했던 이유가 ‘권력의 방송 간섭이 없어서’일까. 물론 아니다. 오 판사는 “아무도 이 조항을 위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 권력이 언제든 쉽게 방송 관계자를 접촉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함으로써 방송 편성에 영향을 미쳐왔는데도 이를 관행 정도로 치부하거나 나아가 이를 본연의 업무 수행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왜곡된 인식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이 의원 역시 “안이하고 위험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 판사는 이 주장에 대해 “잘못된 상황을 그대로 버려둬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권력의 언론 간섭이 계속되도록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 시스템의 낙후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며 “정치적 의도가 의심되니 사법적 판단을 변경해야 한다는 변호인의 주장이야말로 매우 정치적이고 위험한 주장”이라고 일갈했다.
판결이 선고된 직후 언론개혁시민연대는 “KBS 보도통제를 ‘홍보수석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라 감쌌던 당시 청와대와 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국민에게 석고 대죄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심 재판부의 판결 모든 문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김시곤 전 국장은 “청와대의 보도 통제 배경은 대통령이 KBS 사장을 일방적으로 선임할 수 있는 비정상 구조에 있다”며 KBS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이 의원은 판결 선고 3일 후인 지난 17일 항소장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