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일주일 만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김용균’이란 이름이 등장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그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하고서 일주일이 지난 17일이었다. 조선일보는 온라인에 “대통령 만나자고 할 때는 안 오더니, 사람이 죽어야 오나”라는 기사로 14일에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하긴 했지만, 지면 보도는 17일이 처음이었다. 국내 종합일간지 가운데 오직 두 언론사만이 일주일 동안 김용균씨가 사망한 사건을 무시했고, 17일에 마치 하루이틀 전에 발생한 사건처럼 첫 보도를 내놨다.
두 신문사가 김용균씨 사건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위험한 일이 원청에서 하청으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최약자에게 떠넘겨지는 사실, 이런 산업재해가 빈번한데도 기업은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현실 등이 이들 언론사에겐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아니었을까. 이런 의심엔 근거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문제의 일주일 간 조선과 동아에 김용균씨 사건을 다루려 했던 기자가 없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언론사의 기자 중엔 세월호 유가족들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보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을까. 이명박, 박근혜 정권 중에 있었던 국가폭력에 비판적이었던 기자들이 없었을까.
짧은 기간 보수언론에 몸 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면 꼭 그렇진 않다. 다만 기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분명한 분위기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사례들이다. ‘렌트푸어’ 등 각종 푸어를 다루는 기획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필자는 취재 대상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언론사 사옥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권의 사각지대라는 사실을 기사로 썼더니, 내용은 그대로 실렸으나 이 노동자가 일하는 직장명과 건물명이 익명으로 처리됐다. 동부하이텍의 주주총회를 취재하다보니, 사회자가 들고 있는 큐시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의 명단이 명시돼 있었다. 이런 사안을 취재하니, 지휘 계통에 있지 않은 언론사 간부가 취재 경위를 질문해 왔다. 결국 해당 내용은 기사에서 빠졌다.
한겨레신문으로 이직한 이후엔 보수 언론에서 같이 일했던 옛 동료로부터 “우리 회사에선 못 쓰는 기사”라며 제보를 받기도 했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이 보도본부장으로 있던 TV조선에서 동국제강 회장과 관련된 땅 소송을 다루려 했던 취재가 좌절된 사례였다. 해당 기자는 불익의 가능성에도 아랑곳 않고 타사 기자인 내게 기사를 넘겼다.
보수언론의 기자라고 해서 사회의 아픔을 모르진 않는다. 회사의 방향을 거스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전략적인 접근이 요구되기도 한다. 최근 조선일보는 한겨레21에 연재한 글을 묶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란 책을 출간해 조명을 받은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조선일보가 외면한 아픔들을 집중 연구한 김 교수를 조선일보가 인터뷰하는 다소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담당 기자의 전략적인 접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역설이라면 얼마든지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