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행사됐던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이 더 이상 허용돼선 안 된다는 선언.”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오연수 판사는 방송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현 의원(무소속)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면서 판결 의미를 이처럼 강조했다. 1987년 방송법이 제정된 뒤 이 법에 의한 첫 유죄 판결이다.
문제된 사건은 2014년 4월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때다.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2014년 4월21일과 30일 두 차례 김시곤 KBS 보도국장(현 KBS 인재개발부 소속)에게 전화를 걸어 KBS 보도에 항의하고 “내용을 바꿔 달라”, “뉴스 편집에서 빼 달라”고 압박했다. “이런 식으로 지금 국가가 어렵고 온 나라가 어려운데, (KBS가) 지금 그렇게 해경하고 정부를 두들겨 패야 하는 게 맞느냐”는 이정현 홍보수석의 발언은 다급했고 거칠었으며 고압적이었다. 세월호 수색 구조 작업이 한창일 때였다.
지난 17일 경기도 수원에서 만난 김 전 국장도 이번 판결에 깜짝 놀란 듯했다. 그러면서도 “판결 자체가 완벽했다”며 “더 의미를 부연할 것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판결이었다. 워낙 판사 논리가 촘촘해서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번 판결로 이제 권력이 대놓고 직접 전화해서 보도 책임자를 압박하는 일은 사라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판결이 이대로 확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지난 4월 이 재판 증인으로 출석해 강조한 ‘언론 자유의 의미’는 고스란히 이번 판결문에 담겼다. 실제 오 판사는 선고 공판에서 언론 자유의 의미를 강조했다. “방송법이 제정된 지 상당 기간이 지나도록 기소와 처벌이 전무했던 이유는 국가 권력의 부당한 방송 개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언제든 쉽게 방송 관계자들과 접촉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편성에 영향을 미쳤는데도 이를 관행 정도로 치부하는 왜곡된 인식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김 전 국장은 “재판 당일 언론들은 이정현의 ‘의원직 상실형’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핵심은 그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언론 자유를 위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정현 의원처럼 보도에 개입하면 처벌 받게 된다는 경고를 내린 거다. 민주주의에서 언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김 전 국장은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의 KBS 인사 개입과 보도 외압 의혹을 폭로하며 보도국장에서 사퇴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당시 길환영 KBS 사장이 김 전 국장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는 폭로는 한국 공영방송의 취약한 정치적 독립성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이후 KBS는 양대 노조 파업 국면으로 이어졌고 길환영 전 사장은 해임됐다.
길 전 사장은 지난 6월 충남 천안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국회의원 재선거를 나갔다가 낙마했다. 반면 김 전 국장은 이정현 의원의 ‘보도 통제’ 통화 내용을 2016년 공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KBS 인재개발원으로 발령 받았다. 그는 서울(본사)로 다시 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번 판결만으로 공영방송 독립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김 전 국장은 “권력의 보도 통제를 근절하려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보도 책임자 의지가 약하면 권력에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국장은 “청와대의 보도 통제 배경은 대통령이 KBS 사장을 일방적으로 선임할 수 있는 비정상 구조에 있다”며 “KBS 사장 선임 구조를 이제는 정말 바꿔야 한다. 이번 정부가 사장 선임에 직접 개입하진 않았겠지만 제도적 보완이 이뤄지지 않으면 권력이 KBS 사장의 목덜미를 틀어쥐려는 현상은 막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제도적으로 완벽하다는 전제 하에서 공영방송 만큼 언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은 없다”며 “박근혜 정권도 언론 역할을 존중했다면 ‘탄핵’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 당장 눈앞 이익에, 모든 걸 차지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를 강조했다. 김 전 국장은 “지금 보수 인사들이 유튜브를 통해 ‘가짜뉴스’를 뿌리고 있다. 공영방송이 제대로 감시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며 공영방송의 건전한 비판 역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