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는 언제부턴가 당적을 바꾸는 인사를 철새로 비유했다. 의원직 유지를 위해 당을 옮기는 처사는 그리 떳떳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이념과 정체성이 아닐까. 이념이 바뀌고 정체성을 바로잡는다고 말한다면 그리 비난 할 수가 없다. 생각이 바뀐 것이니까. 요즘엔 당적을 옮긴 사실 보다 오히려 ‘막말’이라고 하는 튀는 언사로 이목을 끌고 있다. 언론으로서는 조회수가 중요하고 정치인으로서는 인지도가 중요하니까. 조선시대에도 정체성을 바꾼 사람들이 있다.

사신은 말한다. “조광조가 귀양 간 지 한 달 남짓 되어도 임금의 노여움은 아직 풀리지 않았으나, 죽이자고 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결단하지 못하였다. 생원 황이옥이 이를 알아차리고 망령된 이래(李來)·윤세정(尹世貞)과 함께 상소하여, 조광조를 심하게 헐뜯고 사류(士類)를 많이 끌어내어 응견(鷹犬) 등으로 지목하니, 임금이 상소를 보고서 조광조 등을 사사(賜死)했고, 이옥 등에게는 칭찬하여 술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이옥이 처음에는 조광조 등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변호하고 구원하는 상소를 기초하여 벗들에게 보였으나 마침내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에 상소를 고치고서 조광조를 헐뜯어 임금의 뜻에 영합하니 사람들이 모두 ‘본디 성품이 흉악한 자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14년 12월 14일)

▲ 조광조 적려유허비. 사진=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광조 적려유허비. 사진=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이옥이란 인물은 사관의 논평처럼 처음엔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뒤에는 남곤과 심정 세력에 가담해 오히려 조광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자신의 행실 때문인지 본래 이름 황계옥(黃季沃)을 황이옥(黃李沃)으로 바꿨다고 한다. 명분과 의리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옥(李沃)은 일찍이 송시열을 높여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견주었는데도 지금 앞장서서 팔을 걷어 올리고 나섰으니, 사람들이 황이옥(黃李沃)에 견주었다.… 이때 조세환(趙世煥)이 ‘우리 동방에 앞뒤로 이옥(李沃)이 태어나니 사문(斯文: 유학)의 액운이라 천운을 어찌하리.’라는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전해가며 외웠다.”(숙종실록, 숙종1년 4월 10일) 이옥이라는 사람이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송시열을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때의 이옥은 누구인가. 바로 남인계 정객이다. 그는 숙종 초 집권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 질 때 중간적 인물로 분류되었다. 장인 이동규(李同揆)가 윤휴(尹鑴)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옥도 허목(許穆)과 윤휴를 추종하던 청남계였다. 그런데, 탁남의 영수 허적(許積)이 자신의 아버지 이관징(李觀徵)에게 진외가 5촌 아저씨뻘이라는 관계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관은 이옥을 청남도 탁남도 아닌 중간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 송시열 수명유허비. 사진=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송시열 수명유허비. 사진=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옥은 가문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남인의 핵심이었지만 한 때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셨다. 헌데, 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 즉위와 동시에 남인이 집권하면서 한 때 제자였으면서 송시열 공격의 첨병으로 나섰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50여년 만에 다시금 정권을 잡은 남인이었기에 송시열에 대한 공격이 치열했다. 이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사권을 가지기 위해 이조전랑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이조참의 유명천(柳命天)이 막아버렸다. 유명천은 권대운과 함께 선조(宣祖)의 부마(駙馬)가문 인사들로서 탁남계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옥과 유명천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서로 막말로 비난했기 때문엔 숙종은 둘을 의금부에 내려 실상을 조사하게 했다. 의금부의 보고를 받은 숙종은 이렇게 말했다. “이옥의 뒤 짚고 종잡을 수 없는 태도가 매우 밉다. 자기가 송시열과 두 번 이나 주고받은 편지가 있었는데도 변명하는 상소에는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남을 속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다. 이처럼 옳지 못한 사람은 직첩만을 빼앗지 말고 변방에 유배 보내 후세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하라.”

요즘 정치인들이 튀는 언사로 한때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전보다 더 많은 국민들의 지지도 받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진다는 것을 한 번 더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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