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성폭력이 언론을 통해 크게 공론화된 기업의 후속 대응은 회사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임원이 성폭력 피해자 말하기대회를 참관하면서 교육받은 기업이 있는 반면, 특별한 개선책 없이 피해자에게 업무상 불이익을 줘 4년 간 법정 싸움을 벌인 기업도 있었다. 관건은 조직 문화를 바꾸려는 의지 차이였다.

가구회사 한샘의 대응은 진일보했다. 한샘은 지난 6월 성차별·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대응 매뉴얼 자료집을 완성해 전 직원 3000여명에게 배포했다. 자료집 이름은 ‘머물고 싶은 공간을 위한 약속’이다. 모두 57쪽 분량으로 성차별·성희롱·성폭력에 △대응 지침 내규 △내규를 풀어 쓴 세부 매뉴얼 △사건 대응 절차 안내 등을 담았다.

▲ 주식회사 한샘은 2018년 6월 7개월 간 제작·감수 과정을 거쳐 성차별·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대응 매뉴얼 '머물고 싶은 공간을 위한 약속' 자료집을 발간했다.
▲ (주)한샘은 지난 6월 7개월 간 제작·감수를 거쳐 성차별·성희롱·성폭력 예방과 대응 매뉴얼 ‘머물고 싶은 공간을 위한 약속’ 자료집을 발간했다.

‘예방을 위한 10계명’도 있다. 1번 ‘한샘 임직원은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킨다’, 2번 ‘평소 동료 간 존칭을 사용한다’로 시작해 △고정된 성역할 및 외모·사생활 평가 금지 △원치 않는 신체접촉 금지 △의도와 무관한 성폭력이 가능함을 명심 △상대의 거부의사 존중 △동료 성차별·성폭력 피해 적극 조력 등을 약속했다.

3번은 “회식은 1차에서 1가지 술로 9시까지만 한다”는 회식문화 조항이다. 한샘은 “사건이 대개 회식 후 발생하는 점을 고려해 늦은 시간 회식을 지양해 사고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했다. 실효성을 위해 9시 이후 회식은 법인카드 결제 승인이 불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신설된 기업문화실 임원은 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는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대회’를, 법무부서 등 유관부서는 이화여대가 주최한 미투 성폭력 고발운동 강연을 찾아가 듣고 성인지감수성 교육을 거쳤다. 이밖에 사건을 심의하는 성고충심의위원회에 외부 전문가위원 2명을 두고 피해자 보호를 사업주 의무로 명시했다.

한샘은 대응책 마련에 7개월씩이나 인력, 시간, 자원을 투자한 이유를 “작년 사건으로 직장 내 성차별 및 성폭력은 반드시 근절해야 할 중대 사안이며 조직 문제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사건 처리원칙을 국가기관에 준할 정도로 엄히 세우고, 사건을 예방하고자 성폭력의 원인과 문제점, 대처방법에 관한 매뉴얼을 제작·배포했다”고 밝혔다.

photo_2018-12-05_18-46-34.jpg
▲ ‘머물고 싶은 공간을 위한 약속’ 자료집 중에서.
▲ ‘머물고 싶은 공간을 위한 약속’ 자료집 중에서.

성폭력사건을 겪은 다른 기업들은 이후 교육강화 외엔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한샘 성폭력 사건이 알려진 직후 공론화된 현대카드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가해자 모두 현대카드에 고용되지 않은 도급계약자인데다 성폭력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자체 감사 결과대로 종결됐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현대카드는 성폭력 문제에 매우 엄격히 대응하는 회사로 도급계약자에도 관련 절차가 다 마련돼있다. 다만 이 사건은 검경에서도 무혐의로 처분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고 밝혔다.

같은 달 공론화된 한국시티은행 불법촬영 건은 가해자 면직과 특별 교육 실시로 마무리됐다. 한국시티은행 관계자는 “주기적 인사정보를 통해 은행 윤리강령, 직장 내 상호존중을 지속적 강조하며, 직장 내 성희롱에 적극적 상부보고의 중요성을 명시했다. 적극 보고를 독려하려고 보고 대상과 방법을 안내한 리플릿을 제작해 전 직원 배포 및 자리에 부착했고 익명 신고 방법도 안내했다”고 밝혔다.

올해 초 ‘성희롱·성추행 의전 미투’로 도마에 올랐던 아시아나항공은 교육 강화, 불필요한 행사 축소 등을 통해 조직문화를 개선 중이라 밝혔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여성 비중이 높은 회사라 여직원 지원 정책, 성 관련 문제에 엄격히 대응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불필요한 행사를 축소하고 승무원 복장 규정을 간소화하는 등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2013년 공론화된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은 지난해 12월 대법원 판결로 마무리됐다. 법원은 피해자가 사건 신고 후 1여년 간 업무상 불이익을 받은 것에 회사와 담당이사, 인사팀장, 가해직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은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한 경우 사업주는 피해자를 적극 보호해 구제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이와 관련 르노삼성자동차는 2차 피해 방지와 관련된 구체적 개선 조치는 없었으나 “문제 발생 시 즉각 조치, 철저한 교육 등의 노력을 하면서 근본적으론 여성인력이 우대받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데 노력 중”이라 밝혔다.

이와 관련 노선이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성차별 사건 대응은 한둘이 더 조심하고, 담당자 한둘이 사건을 처리하면 될 문제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드는 데 의미가 있다”며 “직원들은 회사가 후속조치 마련에 시간, 인력, 자본을 투자한 점이나 여러 관계자들이 함께 모색해나간 과정을 보면서 조직문화 변화에 기대를 가질 수 있다. 한샘 경우 이 부분이 진일보한 면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