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사건은 내가 재야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였다. 내 삶에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후 자서전 ‘운명이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부림사건이 뭐길래 인간 노무현을 한순간에 바꿔 놨을까.

전두환 정권은 1981년 9월 ‘부림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부림사건에서 ‘사건’은 없었다.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다. 저항할 기미가 있는 대학생을 ‘예비검속’한 것이었다. 이호철 송병곤 김재규 노재열 이상록 고호석 설동일 같은 대학생 22명이 구속됐다.

부산엔 1978년 4월 이흥록 변호사와 개신교 목사, 가톨릭 신부 몇몇이 대학생들과 함께 독서모임 같은 ‘양서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회원들이 박정희 시해 직후인 1979년 11월 대부분 잡혀가 검속할 사람이 남지도 않았다.

부산대생들이 1981년 6월11일 남은 저항세력을 다 끌어모아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학내시위에 나섰다. 시위 직후 경찰의 대대적 수사가 시작됐다. 한 달 동안 30~40명이 부산역 뒤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건 부산시경 대공분실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7월21일 새벽 22명을 일제히 검거해 부림사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에 인권변호사는 이흥록 김광일 2명 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사가 두 선배 변호사까지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았다”고 회고했다.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간 노무현 변호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2013년) 포스터. 영화 속 송변의 인생을 바꾼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
▲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2013년) 포스터. 영화 속 송변의 인생을 바꾼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

청년들은 두 달 넘게 불법 구금돼 몽둥이 찜질과 물고문을 당해 초췌한 몰골이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구금돼 있었다. 그 어머니는 4·19때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나왔다는 얘길 들으면 아들인지 싶어 가슴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 청년은 내 앞에서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송병곤이다. 그의 선배로 부림사건 수괴로 검거돼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던 고 이상록씨는 “부림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초기 불안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일제 정지 작업으로 부산지역 저항세력을 싹쓸이한 사건이었다”고 기록했다. 영화 속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대립했던 검사는 최병국 전 국회의원이다.

송병곤은 6월 항쟁이 끝나고 문재인 변호사가 운영하는 노동법률상담소로 복귀한 뒤부터 줄곧 문 대통령 곁을 지켰다. 그는 이름 뒤에 늘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장이란 직함을 달고 살았다. 

▲ 국제신문 2014년 5월10일자 4면
▲ 국제신문 2014년 5월10일자 4면. 당시 송병곤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은 부산시의원에 출사표를 냈다.
그는 30년간 노동법률상담을 해온 전문성을 갖췄다. 4년 전까지 부산에서 광역의원으로 출마했던 자기 정치의 경험도 있다. 그는 4년 전 지방선거에서도 30% 넘는 득표율을 보였기에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만 했어도 당선이 유력했다. 그 사이 변수는 모시던 주군이 대통령이 된 것 밖에 없다. 그가 지난달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운영하는 공기업 그랜드코리아레저의 상임이사가 됐다. 못내 아쉽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8일자 8면에 그의 낙하산 논란을 비판한 데 이어 다음 날엔 사설로 “문 대통령과의 사적 인연을 바탕으로 내리꽂히고 있는 낙하산 인사들은 ‘권력 사유화’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청년 송병곤이 영장없이 구금돼 매 맞던 1981년 7월 조선일보는 무엇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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