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4일 영국 글래스고의 학생용 셰어하우스에서 화재가 나 대학생 2명이 사망했다. 화재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고 창문에 쇠창살이 있어 제대로 대피를 할 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은 5명 이상 거주 시설에 대한 임대등록제를 전면 의무화했다. 안전설비·면적·소음 등 주거기준을 충족해야 면허증을 발급하는 방식이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그렇다면 한국은”이라 물었다. 지난달 9일 발생한 국일고시원 화재처럼 십수년 간 쪽방·고시원의 유사 화재 사고가 반복됐음에도 한국 사회는 방관했다는 지적이다.

‘국일고시원 참사’ 한 달을 맞은 4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2018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 주거권네트워크,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인권주간조직위원회 등 인권단체는 서울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고시원 화재참사 한 달, 비주택 주거실태와 과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취약계층 안전을 보호하는 강제력있는 제도가 필요하며 이는 주거권을 생명권으로 보는 ‘비적정주거’ 개념을 전제해야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제언했다.

▲ 화재 발생으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 감식현장. 사진=노컷뉴스
▲ 화재 발생으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 감식현장. 사진=노컷뉴스

한국은 ‘비주택 거주 가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 연구 결과 2005년 5만7000여개였던 비주택 가구는 2015년 39만3700여개로 6배 가량 늘었다. 전체 가구 대비 비주택 가구율이 2005년 0.4%였다면 2015년엔 2.1%로 급증했다. 최 소장은 “청년 비주택 가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20~30대 청년 빈곤 심화를 이유로 들었다. ‘비주택’은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택 이외의 거처로 판잣집, 비닐하우스, 쪽방(여관 숙식 포함), 고시원 등이 포함된다.

고시원이 늘면서 화재사고도 꾸준히 늘었다. 소방청 통계 기준, 고시원은 2009년 6597개에서 2017년 1만1892개로 증가했다. 화재사고는 2009년 34건에서 2013년 64건으로 늘더니 2016년 87건, 2017년 72건을 기록했다. 2009년부터 화재 사망자는 5명, 부상자는 63명이다. 2009년은 2008년 10월 서울 강남의 고시원 화재로 6명이 사망한 후 다중이용업소의 간이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법이 통과된 때다. 2003~2008년 보도된 대형 화재사고 6건만 봐도 27명이 사망했고 31명이 다쳤다.

간이스프링클러 의무화는 인명사고를 막기에 역부족이다. 고시원이 가장 밀집된 서울만 봐도 전체 6150개 중 1945개가 2009년 7월8일 이전에 개업해 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고시원의 법적 실체다. 고시원은 개업신고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는 자유업이다. 주택이 아니므로 주거기본법의 최저주거기준을 적용받지 않고 숙박업이 아니므로 공중위생관리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일시적인 소방시설 지원으론 한계가 명백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강훈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부본부장)는 “고시원 영업을 신고 또는 허가를 받도록 법을 고치고, 안전시설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하고 업소를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일시에 도입하긴 어려우므로 20년 영업 시한을 설정해 이후까지 충족하지 않는 시설은 폐쇄하고, 신규 시설은 허가제를 병행하는 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최저주거기준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최 소장은 UN이 제시하는 ‘비적정주거’ 개념을 들었다. UN의 적절한 주거 기준엔 깨끗한 물·전기·채광 접근부터 면적, 경제적 부담가능성, 추위·습기·더위로부터의 보호 등이 포함된다. 최 소장은 “영국은 창문이 없는 다중이용시설은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연채광이 보장된다”며 “6.5㎡도 안되는 면적,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든 복도, 창문 없는 방, 해충이 들끓는 환경을 강행법규로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긴급 취약계층을 위해선 각계 부처의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들을 적절한 주거지로 유도하기 위해선 빈곤가구에 우선순위를 맞춘 무보증금 공공임대주택, 영구·매입·전세임대주택 및 주거급여의 대폭 확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소방방재청 등을 망라한 큰 틀의 주거복지 개선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 소장은 기존의 서비스를 몰라서 누리지 못하는 가구도 많다며 ‘정부→지방정부→군·구청→동주민센터’의 전달 체계도 손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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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인권위원회, 2018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 주거권네트워크,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인권주간조직위원회 등 인권단체는 서울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고시원 화재참사 한 달, 비주택 주거실태와 과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아래 사진은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 피해생존자 양아무개씨. 사진=손가영 기자
▲ 국가인권위원회, 2018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 주거권네트워크,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인권주간조직위원회 등 인권단체는 서울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고시원 화재참사 한 달, 비주택 주거실태와 과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아래 사진은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 피해생존자 양아무개씨. 사진=손가영 기자

현재는 부처 간 실태파악도 통일돼 있지 않다. 가령 쪽방촌 실태조사만 해도 보건복지부와 국토교통부의 파악 규모가 다르다. 보건복지부는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의 일부 쪽방촌 지역만 조사해 6192명 가량을 파악했고 국토교통부는 자체 조사로 7만여명이라 추산했다. 최 소장은 “통계청이 나서서 인구주택총조사 조사 항목을 수정해 ‘비적정주거’ 전체 모집단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불이 났다고 소방대책만 말하는 건 명쾌하고 쉬울 뿐 근본대책은 아니다. 취약계층은 그곳이 위험한 걸 몰라서 간 게 아니라 75% 가량은 싸서, 나머진 교통이 용이해서 간 것”이라며 “적절한 주거가 곧 안전이다. 최저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송오영 인권위 사회인권과장은 “화재 인명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이 주목하고 정부에서는 고시원 전수 조사 등 대책을 발표하지만 근본 개선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인권위는 정부가 UN 주거권 특별보고관의 보고를 엄중히 듣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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