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여성인 작가 A씨는 면접관으로부터 ‘우리 팀은 메인 작가도 처녀다. 유부녀 들어오면 분위기 흐려진다’, ‘임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든지 불임(난임)이면 합격시켜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가까스로 일을 시작한 뒤에는 스스로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동료 작가를 두고 ‘배불러 회사 다니는 것 보기 안 좋다, 윗분들이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출산 후 복귀한 선배 작가 뒤에선 ‘똑똑했던 작가들도 애 낳으니 멍청해지더라’는 말이 들렸다. ‘마음 놓고 밤 샐 수 있는 젊은 애들이 많은데 누가 애 보러 가야 하는 애 엄마 쓰겠느냐’는 얘기에 A씨조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덜컥 아이를 갖게 됐다. A씨는 임신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체력이 달릴 때마다 임신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을까 고민했지만, 둘째를 임신한 동료 작가가 들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결국 포기했다. ‘임신은 잘 되네’, ‘일 그만두려는 생각이구나?’라는 말들은 마치 A를 겨냥한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임신 탓을 듣게 될까봐 지방촬영에 꼬박꼬박 따라가고 대본작업에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이를 잃었다. 

방송은 진행되고 있고, 정식 휴가를 받을 수도 없는 신분이기에 유산 사실을 알린 뒤 잠깐 휴식 후 출근했다. A씨를 보고 다가온 팀장은 ‘쉬더니 얼굴 좋아 보인다. 애는 또 금방 들어선다’고 첫마디를 건넸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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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 사례는 2018년 현재 방송작가로 살아가는 여성들 이야기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이미지, 방송작가유니온)가 11월20일부터 7일간 222명의 여성작가(기혼 105명, 미혼 117명)를 대상으로 진행해 28일 공개한 ‘모성권 관련 실태조사’에서 결혼 및 임신과 관련해 들은 부당한 말과 상황을 묻는 질문에 나왔던 답변들을 취합해 재구성한 현실이 A씨의 사례다.

문재인 정부 정책 기조는 임신 배려와 출산 장려다. 하지만 여성이 94.6%로 절대다수인 방송작가들은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임신을 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게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본인이 원할 때 자유롭게 임신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29.2%에 불과했다. 10명 중 7명은 임신 결정이 자유롭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혼인 여부에 따라 응답을 구분했을 때도 비율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임신 결정이 자유롭지 않은 이유로는 과반이 넘는 66.1%가 ‘높은 노동강도, 잦은 밤샘 등으로 일과 임신 및 출산을 병행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임신 이후의 휴가 및 휴직혜택 전무(25.3%), 임신 이후 해고 등 불이익 예상(7%), 동료들의 곱지 않은 시선(1.6%)이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작가들의 업무 환경 자체가 모성 보호권을 지키기에 아주 열악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타 직종 대비 방송작가가 경력을 이어가는 데 결혼·임신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 응답자가 79%, 기혼 응답자 중 임신 후 일을 그만둔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65.3%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결혼 및 임신과 관련해 실제 현장에서 들은 부당한 말이나 상황을 묻는 주관식 질문의 답변을 분류한 결과 △결혼·임신할 경우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59건) △결혼·임신으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30건) △기혼·유자녀 작가에 대한 비하 및 차별 발언(29건) △업무로 인한 유산 상황(3건) △면접 시 출산·임신 관련 질문(3건) 순으로 나타났다.

결혼이나 출산을 위해 휴가를 사용해봤다는 방송작가는 28.7%에 그쳤다. 그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작가들 중에서도 그 기간을 묻는 질문에는 1개월 미만이었다는 응답자가 66.7%로 가장 높았다. 3개월 이상 출산 휴가를 사용한 응답자는 9%에 불과했다. 휴식을 취한 형태로 응답자 61.7%는 ‘일을 그만뒀다’고 답했고, 26%는 ‘임시로 다른 작가에게 일을 맡겼다’고 답했다. 

임신 경험이 있는 응답자 24.8%는 유산을 했거나 유산 징후를 겪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임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기혼자 응답을 떼어서 보면 유산(징후) 경험 비중은 더 높아진다. 기혼 응답자 17%는 유산을 한 적이 있었고, 15.9%는 임신 이후 유산 징후가 나타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혼인한 여성 방송작가 가운데 약 30%가 유산 관련 경험을 겪었다는 의미다.

방송작가들 모성권 보호를 위해 가장 시급히 도입해야 할 제도(2개 조항 중복 선택)로는 유급 출산(결혼) 휴가(123명), 출산(결혼·육아) 시 해고되지 않을 조항(100명), 재택 근무 인정(92명), 연차 경력단절 시기에 대한 보상 및 제도(81명), 워킹맘 인증을 위해 재직증명서 등 각종 증명서 발급(64명) 순으로 나타났다.

방송작가유니온은 “방송작가는 대다수가 여성임에도 프리랜서라는 허울 속에 여성 노동자로서 당연히 보호 받아야 할 권리에서 배제돼왔다. 방송작가들은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모성권’ 역시 철저히 소외돼 왔다”며 “방송작가들의 인권제고를 위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방송작가들의 모성권 찾기를 위한 제도적 보완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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