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역공단 중소기업 사장은 수시로 폭언·갑질을 일삼았다. 주로 생산직 남성들에게 욕설을 하거나 서랍장을 걷어차고 서류를 집어던지며 업무를 지시했는데 급기야 여성직원에게도 같은 행동을 했다. 위협을 느낀 한 직원의 신고에 고용노동부는 “체불임금이 생기면 오라”고 했다. 노동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직장갑질119를 찾아가시라”고도 했다. 지난해 겨울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상담한 사례다.

전수경 직장갑질119 활동가는 27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직장 내 괴롭힘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를 본 뒤 “‘직장 내 괴롭힘’ 법안(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이런 문제에 기준을 세워준다. 법안이 부족하다 해도 정부·국회는 할 수 있는 것부터 신속히 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9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한 직장 내 괴롭힘 법안이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한 상황을 꼬집은 말이다.

▲ 11월 27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국회입법조사처 및 한국사회법학회 주최로 ‘직장 내 괴롭힘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 11월 27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국회입법조사처 및 한국사회법학회 주최로 ‘직장 내 괴롭힘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토론회에 나온 연구자 9명 중 7명도 “문제 해결의 시작으로서 충분한 내용의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괴롭힘 정의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법사위 통과가 유보된 가운데 이들은 “법안 내용이 최소한의 수준인 데다 다른 법과 비교해도 모호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개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정신·정서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 정한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형사처벌을 위해 만든 법안이 아니기에 개념 모호성 문제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개정법안은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담고 있지 않다. 환노위 논의에서 내용이 축소되며 △개념 정의 △사용자 신고·조사·조치 의무화 △취업규칙 기재사항 의무화 등만 담겼다. 형사법이 따르는 ‘명확성 원칙’ 위반 여부가 주요 쟁점이 아닌 셈이다.

학교폭력예방법의 따돌림 규정,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괴롭힘 규정, 공익신고자 보호법의 불이익조치 규정과 비교해도 일반적이란 지적도 있다. 문준혁 서울대학교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원은 ”이미 현행법 내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추상적인 형태로 규정돼있다. 가이드라인 확립 등 방안을 고려할 수 있지 법률 원칙을 위반하는 정도는 아니“라 지적했다.

▲ 학교폭력예방법의 따돌림 규정,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괴롭힘 규정.
▲ 학교폭력예방법의 따돌림 규정,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괴롭힘 규정.

박수경 한국방송통신대 연구원은 직장 내 괴롭힘 문제 해결에서 한국보다 한 걸음 앞선 일본 사례를 주시했다. 후생노동성이 정한 직장 내 괴롭힘 정의는 한국 법안과 흡사하다. 일본이 정한 조건은 △우월한 관계에 근거하고 △업무 적정 범위를 초월하며 △신체·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취업환경을 저해하는 것이다.

주로 경영계 쪽에서 ‘개념이 모호하다’고 항의했으나 당국은 구체 사례를 제시할 거라 밝히고 이 논의 단계를 뛰어넘었다. 당국은 기업에 직장 내 괴롭힘 방지 대응을 의무화하는 방침을 세우고 법안을 준비 중이며 지난 19일까지 네 차례 회의를 마쳤다. 박 연구원은 “논의가 적극 진행된다면 내년 상반기에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다수 연구자는 법안 통과가 우선이고 후속 과제를 시급히 논의할 때라 본 가운데 김앤장 법률사무소 관계자는 모호성을 강조했다. 한인상 입법조사관은 “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에게 신고하도록 정했는데 사용자가 괴롭힘 당사자일 경우가 많다”며 “사건을 둘러싼 분쟁 발생 시 해소 방안, 피해자 구제 방안 내용도 빠졌고 특수고용근로자나 직접 고용관계가 없는 파견·사내하청근로자들도 사각지대에 있다. 향후 논의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혜원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도 “직장 내 괴롭힘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획일적으로 정의하는게 어렵다. 시행령 등 하위법규나 판례, 행정해석을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세리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부하·동료직원의 괴롭힘 등이 충분히 가능한데 ‘관계의 우위성’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고 ‘업무상 적정범위’ 부분도 사용자의 재량영역과 분명히 배치되는데 어떻게 기준을 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이 변호사는 법안이 피해자 불이익 조치에 대해 사용자에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 제재를 둔 것과 관련 “형사처벌이 규정된 이상 명확성 원칙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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