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직업병 문제가 가시화되기 전 산재 불승인 됐던 직업병 의심 피해자가 “9년 전 잘못된 결정을 바로 잡아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서를 다시 넣었다. 지난 9년간 논란이 확대되면서 밝혀진 과학적·법리적 지식을 반영하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2005년 뇌종양 확진을 받고 13년 간 산재 인정 싸움을 해온 한혜경씨(40)는 지난 10월16일 근로복지공단 수원지사에 요양급여 신청서를 재접수했다. 2009년 3월 평택지사에 최초 산재 신청을 한지 9년 만이다. 2009년은 백혈병 등 삼성전자 반도체·LCD공장 직업병 논란이 널리 확산되기 전이다.

한씨는 만 17세이던 1995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해 2001년까지 LCD 모듈공정에서 일했다. ‘PCB 패널’에 필요 부품을 납땜해 연결하는 게 주 업무였다. 한씨는 납, 주석, 플럭스(납땜 용접을 용이하게 하는 혼합염)를 섞은 ‘솔더크림’과 240℃까지 오르는 리플로우기 설비를 썼다. 수동납땜을 할 땐 설비 온도가 최고 500℃까지 올라갔다. 납·플럭스에서 나오는 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 23일 삼성전자-반올림 합의이행 협약식엔 취재인파가 몰렸다. 기념촬영 중 기자가 요청해 김기남 대표이사와 투병 중인 한혜경씨가 악수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3일 삼성전자-반올림 합의이행 협약식엔 취재인파가 몰렸다. 기념촬영 중 기자가 요청해 김기남 대표이사와 투병 중인 한혜경씨가 악수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한씨는 2010년 1월 최초 산재 신청에서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납 노출 가능성은 있으나 노출 수준이 적고, 전자업종 노동자의 뇌종양에 대한 역학적 근거가 희박하며 플럭스, IPA(이소프로필알콜) 등 화학물질과 뇌종양 간 인과관계 근거도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한씨는 같은 이유로 두 차례 재심사에서 실패했고 행정소송도 패소했다. 1심(재판장 정재우)은 “한씨는 ‘금속납’을 사용했고 이는 발암물질로 볼 충분한 근거가 없다”며 한씨가 노출된 각종 유해물질의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재판장 장석조)는 1번의 심리조차 열지 않고 1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재판장 김신)도 2014년 8월 심리불속행 기각처리했다.

한씨가 재신청에 나선 이유는 삼성전자 직업병 운동이 확대된 지난 9년간 산재를 입증할 근거가 다수 나왔기 때문이다. 우선 플럭스 흄의 유해성이 확인됐다. 플러스 흄에서 포름알데히드, 비스클로로메틸에테르(BCME), 톨루엔 등 발암물질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안전보건공단 화학물질등급대책정보’에도 나와있다.

한씨를 대리한 조승규 노무사는 납 노출의 위험성도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은 한씨가 노출된 납은 ‘무기납’이 아니라 ‘금속납’이라 발암물질로 보기 힘들다는 삼성전자 주장을 받아들였다. 조 노무사는 “매우 잘못된 주장으로 납이 기체상태인지 고체상태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한씨는 수백도까지 오르는 장비를 다뤘고 납이 흄·증기로 신체에 흡수되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무기납을 2A급 발암물질로 분류한다.

판례 발전도 한씨에게 유리한 근거다. 대법원은 지난해 8월 LCD 모듈공정 출신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 산재를 인정하며 ‘삼성·고용노동부가 유해화학물질 정보를 비공개했고 역학조사 방식에도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는 회사가 협조하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이 이를 방관하면 업무공간의 위험성을 입증할 수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정 산재 피해자들 대부분이 겪었다. 대법원은 이를 ‘근로자에게 유리한 사실로 고려한다’고 밝혔다.(2015두3867)

또한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또다른 뇌종양 피해자의 산재를 인정하며 발암물질 노출 수치 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 강도 높은 주·야간 교대근무, 과도한 업무량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다.(2016두1066)

행정청은 자신이 내린 처분이 위법하거나 심각한 하자가 있으면 처분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조 노무사는 “한국철도공사가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해고자를 직권으로 복직한 사례가 있다. 대법 판결은 법원 내에서 효력이 있을 뿐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산재 신청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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