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반올림과 삼성전자 간 조정이 공식 타결되기까지 11년이 걸렸다. 대화가 시작된 시점은 2013년, 반올림이 ‘산재 인정 운동’을 시작한 지 6년째였다. 이마저 2015년 9월 무산돼 실제 대화기간은 2년이 채 안된다. 이번 합의는 2018년 7월, 뇌물혐의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집행유예 석방 후에야 본격 재개됐다. 반올림의 11년은 삼성·고용노동부·법원·경찰·언론과 싸워온 시간이었다.

▲ 고 황유미씨(왼쪽)의 살아생전 모습과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 고 황유미씨(왼쪽)의 살아생전 모습과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 반올림 전신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는 2007년 11월20일 결성됐다. 사진=반올림
▲ 반올림 전신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는 2007년 11월20일 결성됐다. 사진=반올림

① 2007년 11월20일 반올림 결성, 보도 고작 5곳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는 2007년 3월 딸의 사망 후 피해자가 분명 더 있을 거란 생각에 기흥공장 사례를 백방으로 찾았다. 황씨는 7년 간 최소 6명이 백혈병에 걸렸고 그 중 5명은 사망한 사실을 알았다. 그 중 고 이숙영씨는 유미씨와 같은 3라인 디퓨전 공정에서 일했고 같은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확진 두 달 만에 숨졌다. 기흥공장은 반도체를 생산한지 24년째였다.

반올림 전신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는 2007년 11월20일 결성됐다. 백혈병 집단발병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있는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20년간 이 공장을 거쳐간 수만명 노동자 중 백혈병 환자가 얼마나 발생했을진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민주노총·노동자 건강권 단체 13곳과 유족이 함께 했다.

기흥공장 앞 기자회견을 찾은 언론사는 단 5곳. 경향신문, 뉴시스, 참세상, 프레시안, 한겨레였다. 여론 일각에선 “반도체 괴담” “불순집단 유언비어”라며 이들 주장을 간과했다.

② 2008년 10월 제보자의 돌변, 관리의 삼성

삼성전자도 마찬가지였다. ‘백혈병은 반도체공장 직업병’이란 반올림 주장에 삼성전자는 ‘괴담’ ‘유언비어’ ‘불순단체의 선동’이란 말까지 쓰며 속지 말라고 직원들을 교육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반올림 활동 초기 삼성전자의 대응을 ‘피해자 매수·관리’라 했다. 황상기씨는 ‘10억원 드릴테니 조용히 있어 달라’고 말한 삼성전자 직원을 봤다. 삼성직원들은 황씨가 처가에 피신할 정도로 집요하게 집을 찾아갔고 출입을 막는 황씨와 문고리를 붙잡고 실랑이도 벌였다. 백혈병 피해자 고 박지연씨 유족도 ‘집을 고쳐드린다’ ‘치료비 드린다’며 회유를 받았다. 삼성전자 LCD공장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씨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10월 국회 국정감사도 대표 사례다. 그해 초 반올림을 찾아와 화학물질·방사능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며 실태를 전해 준 한 엔지니어가 삼성 측 참고인으로 나왔다. 맹독성 가스 사용, 방사선 수치 초과실태도 증언해 준 그는 국정감사에서는 “위험하지 않다”고 반대 증언했다. 그와 함께 일한 선임 셋 중 한 명은 흑색종으로 사망했고 두 명은 백혈병 등 난치성 질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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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초 경찰은 고 박지연씨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입구까지 찾아가 상주했고 채증했다. 사진=반올림
▲ 2010년 3월말 경찰은 고 박지연씨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입구까지 찾아가 상주했고 채증했다. 사진=반올림

③ 2010년 3월 사망자 빈소 채증한 경찰

“정부와 삼성은 한 몸이었고 경찰은 호위무사였다.”(이종란 노무사) 

2007~2010년 반올림은 경찰과 수시로 부딪혔다. 경찰병력은 반올림이 근로복지공단, 고용노동부, 삼성 강남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이나 피켓시위를 할 때 경비를 섰다. 이 노무사만 집회 개최, 경찰 공무방해 등으로 두 번 체포됐다.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곳이 2010년 3월 고 박지연씨 빈소다. 박씨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근무하다 2007년 9월 백혈병이 발병했고 2010년 3월 23세 나이로 숨졌다. 경찰은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입구까지 찾아가 상주했고 채증했다. 4월2일 박씨 발인날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인근 삼성전자 강남사옥 앞에 선 반올림 활동가 7명은 5분 만에 전원 진압돼 경찰에 연행됐다.

▲ 월2일 박씨 발인날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인근 삼성전자 강남사옥 앞에 선 반올림 활동가 7명은 5분 만에 전원 진압돼 경찰에 연행됐다. 사진=반올림
▲ 2010년 4월2일 박씨 발인날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인근 삼성전자 강남사옥 앞에 선 반올림 활동가 7명은 5분 만에 전원 진압돼 경찰에 연행됐다. 사진=반올림

④ 근로복지공단 ‘팔은 삼성으로 굽는다’

2011년 6월23일 반올림에게 기념비적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유미씨, 고 이숙영씨의 백혈병을 수십개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지속 노출돼 발병한 산재로 판정했다. 근로복지공단 산재 불승인에 유족이 건 행정소송이었다. 황씨가 2007년 6월1일 최초 산재신청을 한 이래 4년 만에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유족은 2주 후 근로복지공단에서 ‘이사장 나오라’며 연좌했다. 근로복지공단이 1심 판결에 반발해 항소한 것이다. 반올림은 “근로복지공단은 4년 간 부당하게 불승인을 내려 유족에게 사죄 의사를 밝혀야 할 곳”이라며 항소 철회를 요구했다. 공단이 끝내 철회하지 않아 항소심이 진행됐다. 결과는 1심과 같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이후에도 삼성전자 직업병 사건 관련 항소를 4차례 더 했다. △2013년 11월5일 고 김경미씨 백혈병 산재 인정 1심 △2014년 11월27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뇌종양 피해자 고 이윤정씨 산재 인정 1심 △2016년 2월18일 삼성반도체 난소암 피해자 고 이은주씨 산재 인정 1심 △2017년 2월27일 삼성전자 LCD 다발성경화증 피해자 김미선씨 산재 인정 1심 등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에 ‘소송 보조참가인’ 참가도 요청했다. 이 노무사는 “당시 전문가들에 수소문해도 산재 사건에 기업을 보조참가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공단은 대형 로펌 변호사를 고용한 삼성과 함께 유미씨 산재 승인 소송 건에 대응했다.

▲ 황유미2009년 경 근로복지공단에서 연좌농성을 한 황상기씨(왼쪽)와 피해 유족 정애정씨. 사진=반올림
▲ 2009년 근로복지공단에서 연좌농성을 한 황상기씨(왼쪽)와 피해 유족 정애정씨. 사진=반올림

⑤ ‘산재 맞다’ 확정에 10년 걸렸다

유미씨는 산재 신청부터 2014년 8월 산재 확정까지 7년이 걸렸다. 이보다 더 오래 걸린 사례가 있다. LCD사업부 천안공장 ‘다발성경화증’ 피해자 이희진씨는 2007년 근로복지공단 산재 신청부터 2017년 8월 대법원 판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근로복지공단, 1·2심 법원 모두 이씨 직업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주심 김재형 대법관)은 “업무와 다발성경화증 발병·악화 간 인과관계를 긍정할 여지가 있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이씨 작업환경과 질환 간 인과관계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민변은 이 판결을 ‘2017년 최고의 디딤돌 판결’로 뽑았다. 이 노무사는 피해자의 산재 입증 책임을 대폭 완화한 부분을 강조했다. 현행법상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지만 회사가 자료제공·협조를 거부하면 작업환경 위험성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기존 판결이 이를 외면했지만 이 판결은 ‘회사의 비공개·비협조는 근로자에게 유리한 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다발성경화증은 피해자와 반올림의 싸움으로 밝혀 낸 직업병이다. 희진씨를 포함해 지금까지 산재 인정을 받은 삼성전자 반도체·LCD 생산라인 출신 다발성경화증 피해자는 4명이다.

▲ 반올림이 문제를 제기한 디지털데일리 기사 제목. 디자인=이우림 기자
▲ 반올림이 문제를 제기한 디지털데일리 기사 제목. 디자인=이우림 기자

⑥ 2014~2015년 “언론이 사람을 죽일 수 있구나”

반올림과 삼성전자 간 직접 대화는 삼성 반도체 산재 인정 운동이 시작되고 6년 후인 2013년 초 시작됐다. 지금의 3대 의제 △재발방지대책 △배제없는 보상 △진정어린 사과가 정해지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삼성이 ‘반올림에 모인 여덟 가족만 우선 보상’을 고집해 평행선을 달렸다. 첫 본협상이 열린 2013년 말, 삼성이 ‘반올림은 빠져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극대화됐다. 2014년 8월까지 대화가 끊겼고 일부 피해가족이 분열돼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꾸려져 3자 협상 구도가 됐다.

이 노무사는 이 시기 “언론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왜곡보도에 대한 상처였다. 이 노무사는 당시 보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고 언론 자체를 회피하는 등 트라우마로 남았다 했다. 가대위의 분열에 반올림이 ‘단체 존속 위해 억지를 부린다’거나 ‘탈퇴를 요구했다’ ‘피해자를 납치해 볼모로 잡고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양측을 중재한 조정위원회 결정을 삼성이 거부했고 반올림은 동의했는데도 왜곡기사가 쏟아졌다. 반올림 때문에 삼성전자 산재 보상이 지연된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반올림은 언론인권센터 도움으로 왜곡 정도가 심한 한국경제·문화일보·아시아경제·디지털데일리·뉴데일리경제 등에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넣었다. 한국경제는 500만원, 문화일보는 총 700만원, 디지털데일리와 뉴데일리경제 각 1000만원씩 1심에서 배상판결을 받았다.

▲ 강남역 8번 출구 반올림 농성장에 위치한 '반도체 소녀상'. 사진=황상기씨 제공
▲ 강남역 8번 출구 반올림 농성장에 위치한 '반도체 소녀상'. 사진=황상기씨 제공

⑦ 2015~2018년 대화 단절, 삼성 “반올림 빠져라”

반올림이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1023일 간 노숙농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은 2015년 7월 중재기구 조정위(위원장 김지형)가 내놓은 권고안을 사실상 거부하며 ‘자체보상’에 나섰다. 반올림은 보상범위가 최소화될 여지를 우려해 ‘배제없는 보상’을 요구했다. 자체보상은 조정위가 권고한 내용도 아니었다. 삼성은 그해 9월 자체보상위원회를 꾸려 12월 말까지 일방 추진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 자체 보상은 안된다. 다시 대화하자”며 10월7일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2018년 7월25일까지 유지됐다. 3년이 걸린 까닭은 대화가 성사되지 않아서다.

대화는 한국사회가 격변을 겪은 뒤 재개됐다.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전 대통령 박근혜씨를 탄핵했다. 2016년 12월 박영수 특검팀이 가동됐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뇌물혐의로 2017년 2월17일 구속됐다. 2016년 11월부터 2017년 3월까지 거의 매주 광화문에서 ‘적폐 청산 촛불집회’가 열렸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으나 에버랜드 공시지가 조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등 비리의혹이 연이어 터져 수사가 진행 중이다.

▲ 삼성전자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 유족과 반올림, 지지 단체 관계자들이 방진복을 입고 경기도 수원 인근 도로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삼성전자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 유족과 반올림, 지지 단체 관계자들이 방진복을 입고 경기도 수원 인근 도로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반올림

⑧ ‘남은 적폐’ 산재심사위원회

이 노무사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재심위)가 남은 적폐라고 했다. 재심위는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처분한 건을 다시 심사하는 고용노동부 기구다. 근로복지공단에 우선 이의제기를 할 수 있고 이 결정에도 불복하면 산재재심사위원회에 다시 심사를 맡길 수 있다.

“반올림 사건(총 96건) 중 11년간 단 한 건도 재심위가 결정을 번복한 적 없다.” 법원이 산재를 인정한 사건도 재심위는 매번 산재가 아니라 판단했다. 산재 피해자들은 재심위에 기대가 없어 곧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가는 추세다. 이 노무사는 이유를 보수적 전문가로 들었다. 상당수가 의사인 심사위원들이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제대로 숙고조차 하지 않는단 것이다.

법원 판례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지난해 8월 대법원 판례는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산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양한 발병 원인을 종합 판단하고 회사의 비협조로 위험한 작업환경이 정확히 입증되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이 면밀히 검토하지 않는 맹점을 짚었다. 이 노무사는 “의료 전문가들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지난해 8월 대법원 판례를 읽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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