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쓸 게 없으면 국민청원 게시판을 뒤지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 포털에서 20일 하루 ‘청와대 청원’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기사는 무려 274건이다. 이슈가 집중된 사안을 손쉽게 파악하고, 여론을 재확산시키는 장(場)으로 청와대 청원 게시판이 활용되는 셈이다.

소위 장사 되는 선정적 게시물이 집중 기사화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언론이 입맛에 맞는 게시물을 골라 여론을 재확산시키고 다시 또 게시물 내용이 이슈가 되면 반복해 기사화한다.

그런데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을 주제로 한 언론보도를 보면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듯하다. “‘내가 피해자’.. ‘성토의 장(場)’된 청와대 국민청원방”, “이수역 폭행 사건에 ‘젠더갈등’ 진흙탕 된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삼권분립 원칙 위반, 무분별한 청원, 중복 동의 등 문제점 드러나”, “‘현대판 신문고’ 청와대 국민청원, 이대로 괜찮은가”, “靑국민청원 절반이 ‘고발-처벌요구’…그중 14%는 팩트 오류” 등이다.

대표적으로 중앙일보는 지난 13일 “너무 나간 청와대 청원…여론재판장 변질”이란 기사에 이어 19일 “‘갈등 진원지’된 靑 청원...美, 150명 동의한 글만 공개”라는 기사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역기능을 부각시켰다.

서울신문은 18일자 “국민청원 합니까, 여론재판 합니까”라는 기사에서 “국민이 정책을 제안하고 의견을 내는 직접민주주의의 효과도 있지만, 특정 사건에 섣부른 판단이나 집단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나온다”며 이수역 폭행사건의 청원 게시판 내용을 들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민청원 게시판의 역기능에 대한 지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부정확한 사실을 확산시키고 여론 재판을 부추길 수 있다”이라고 보도했다.

언론보도는 특정 사건 청원 부작용→청원 게시판 비판→게시판 운용의 개선점 순으로 흘러왔다. 결국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한 보도다. 무분별하고 선정적이라던 게시물 내용을 기사화하고 여론을 확산시켜놓고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의 문제점이라고 꾸짖는 꼴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부작용도 있지만 최근 언론 보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게시물 내용이 문제가 되면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보도가 청와대 청원 게시판의 문제점이다. 게시판 무용론까지 연결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문재인 정부 전매특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있어 직접 민주주의 구현은 최대 과제였다. 그리고 국민청원 게시판은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답하는 국민소통 창구로 자리잡았다.

지난 2017년 8월 개설돼 운용 중인 청원 게시판은 올해 10월까지 30만6000여건의 청원이 접수됐다. 한달 사이 20만명 이상 동의(청와대 답변 의무 기준)를 얻은 건수는 57건이다. 청와대는 52건의 청원에 답변했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폭발적으로 호응하는 이유는 우선 기술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국민청원을 하려면 자신이 가입한 SNS계정을 통해 게시판에 접속하고 관련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IT기술 발전으로 여론 형성의 편의성도 덩달아 따라온 것이다.

20만명 이상 동의하면 청와대가 답변할 의무가 생기기에 청와대가 직접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대감이 크고 이에 따라 효능감을 키운 것도 장점이다. 자기 문제가 곧 사회 문제이고, 정치적 문제이기에 널리 알려 문제를 해결하는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 생겼다. 정치권이 외면했거나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안을 직접 시민이 정치적 의제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 자체로 국민청원 게시판의 효능을 무시할 수 없다.

일례로 음주운전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윤창호법’ 제정 청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입장을 밝힐 만큼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 국회에서 입법 논의 중이다. 경기도 동두천에서 차량 안 여아가 사망하는 사고가 터지고 어린이집 차량 안에 ‘잠자는 아이 확인 장치’인 슬리핑차일드 체크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 청원글이 올라오고 난 뒤 보건복지부는 제도 도입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했다. 기존엔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 사고가 터지면 국회에서 공론화되고 행정부가 입법을 조속히 촉구하는 식으로 지지부진하게 입법이 이뤄졌다면 시민들이 직접 제도를 만들라고 촉구해 여론이 형성되면 곧바로 행정부가 나서 제도를 정비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권한 밖의 무분별한 청원이 많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고 분풀이 창구가 됐다는 비판도 귀를 기울여야하겠지만 과도한 비판 아래 청원 게시판 무용론으로 이어지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고칠 건 고쳐야 하겠지만 소를 잃지 않았는데도 외양간을 없애면 안 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16일 발표한 “미국의 ‘위더피플’ 사례를 통해 살펴본 청와대 국민청원의 개선방안”도 자칫 국민청원 게시판을 위축시키는 방향이 될 수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미국의 ‘위더피플’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교 분석했다. 미국의 ‘위더피플’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벤치마킹 모델로 알려져 있다. 청원사이트 ‘위더피플’은 지난 2011년 미국 오바마 정부 때 개설돼 2016년 12월까지 48만 여건의 청원이 접수됐고 이중 268건이 답변 의무 동의를 받아 227건에 대해 정부가 답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과 달리 ‘위더피플’은 동의 절차 요건이 까다롭다. 청원글을 올리려면 사이트에 가입해 계정(13세 이상)을 만든 뒤 150명으로부터 청원글 공개 여부 동의를 이메일로 받아야 한다. 150명이 동의하면 그때서야 청원글이 게시판에 등록된다. 청와대 게시판이 SNS 가입 계정으로 누구나 한번에 청원글을 올리는 구조라면 미국은 우리보다 문턱이 높은 셈이다. 공개 게시물로 올라와 10만명이 동의하면 60일 안에 백악관은 답변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청원 게시물 내용에도 제한이 있다. 150명 동의를 받아도 “선출직 공직 후보자에 반대 또는 지지가 명백한 청원”, “연방정부의 정책이나 행동을 요청함이 없는 청원과 불법 폭력의 위협이나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해악을 끼치는 내용” 등은 게시되지 않는다. 150명 동의를 받아 게시물이 공개되고 10만명이 동의하더라도 “부적절한 영향을 방지하기 위해 백악관은 연방 법원이나 주 또는 지방자치단체, 연방행정기관 등의 관할권에 속하는 청원에는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정부가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위더피플’과 청원 게시판을 비교 분석해 청원 게시판의 3가지 개선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 ‘위더피플’처럼 일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게시물은 게시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두는 것이다.

두번째 국회입법조사처는 구체적으로 삼권분립 등에 반하는 사항을 요청하는 청원을 무분별한 청원이라고 지목했는데 이 같은 경우 답변 거부를 명시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2심이 진행 중인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나 국회의원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책정해달라는 청원의 경우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나 청와대가 마땅히 답변할 게 없었다고 지적했다.

현행 SNS 계정을 통한 로그인 방법도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이기에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국민의 청원권이 제한된다는 약점이 있다”며 자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여론의 왜곡과 중복 투표를 막기 위해 적절한 실명확인 강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개선방안 내용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 청원 게시판의 취지인 개방성을 후퇴시키고 참여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반론도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권한 밖의 청원, 삼권분립 원칙에 맞지 않은 청원을 제한해야 한다지만 무 자르듯 제한 기준을 정하는 게 만만치 않다. 지난해 12월 아동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 올라와 61만명이 동의했다. 그리고 조국 민정수석은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재심 청구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 다시 한번 올라와 19일 25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조두순은 2008년 어린이를 성폭행해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오는 2020년 만기 출소한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의 본질은 공권력과 사법 판결에 대한 불신이다. 청원글이 다시 올라오고 수많은 시민들의 동의를 얻은 건 청와대의 ‘변화된’ 답변을 기대한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조두순은 심신미약 상태였음을 감안해 3년이 감형됐고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의 잘못된 기소와 사법 판결로 인해 시민들이 두려움에 떠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해결해달라는 것이 해당 청원의 요지였다.

청와대는 언론이 지적하는 청원 게시판의 역기능에 대해 모두 동의할 수 없지만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 게시판의 운용 원칙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청원 게시판 책임을 맡은 정혜승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서면 인터뷰로 “국민청원은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공론장이다. 국민이 직접 아젠다를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가 수렴되는 과정에서 일부 거친 의견도 있으나, 순기능이 아직 더 많다고 본다”고 밝혔다.

정혜승 센터장은 “국민들의 뜻을 여과 없이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신공격 등 명예훼손, 허위정보 유포 등에는 청원 운영 원칙에 따라 관리하는 등 역기능을 최소화하고자 한다”면서 개선방안도 언급했다.

정 센터장은 “청원의 애초 취지 자체가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한 공간인데, 퇴색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부작용 등 역기능이 있다면 보완할 문제다. 청원은 답변 기준 20만명, 운영원칙, 청원AS, 카테고리 탭 추가 등이 모두 오픈 이후 단계적으로 마련한 보완책이었고, 계속 보완한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로그인 방식의 변화에 “로그인 방식의 경우, 한 가지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방식에서 장단점이 다르다. 로그인을 비롯해 운영 방식에서 개선할 점이 있는지는 상시 모니터링하면서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150명 사전 동의 구조는, 1차적으로 집단적 조직적 대응이 가능한 이들에게만 유리할 수 있다. 약자들의 목소리에도 국민들이 직접 힘을 실어주는 현재 구조와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며 “다만, 어느 정도 걸러진 청원에 집중하는 효과도 있다. 두루 살펴 고민하겠다”고 답했다.

정 센터장은 “국민들이 청원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청원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해서도 안된다. 언론은 국민청원에서 제기된 아젠다를 보도함으로써 함께 공론장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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