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전 부총리는 지난 8일 “국회에서 또 뵐 거다. 나중에”라고 말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최근 “물귀신처럼 김 부총리까지 세트로 책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김 전 부총리를 엄호했다. 정진석 한국당 의원도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 부총리의 지혜를 빌려 달라”고 호소했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10일자 5면에 ‘벌써부터… 한국당 러브콜 받는 김동연’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야말로 ‘벌써부터’다. 사실 김 전 부총리는 이명박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국정기획수석실에서 일했고 기획재정부 2차관까지 지냈다. 박근혜정부 때도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사진=연합뉴스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사진=기획재정부

정부와 여당 입장에선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두 번이 아니다.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도 참여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 장관까지 지냈다. 김종훈 전 의원도 2006년 한미 FTA 교섭 때 한국측 수석대표를 지냈다가 2012년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더 멀리 가면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1980년대 한국 진보 이론의 상징이었던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의 양 날개였던 한화갑 한광옥 전 의원도 변신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거나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더 많은 김병준, 한광옥이 안 나왔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 매일경제 11월11일자 5면
▲ 매일경제 11월11일자 5면

왜 이렇게 진보정권은 보수 정치인을 많이 양산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뿌리가 보수라서다. 지금 민주당의 근원은 이승만 정부 때 야당이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에서 출발했다.

한민당은 1945년 9월7일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등이 결성을 발표했다. 한민당은 정치테러의 1호 희생양이 된 송진우가 1945년 12월30일 숨지자 김성수의 동아일보 인맥이 모태가 돼 굴러갔다.

▲ 한민당 초기 당 대표를 지낸 송진우
▲ 한민당 초기 당 대표를 지낸 송진우

산업자본은커녕 상업자본조차 없었던 1945년 한민당은 지주계급의 정치적 방패막이로 출발했다. 당연히 보수 우익정당이었다. 상당 기간 신·구파 내부 권력투쟁도 심했다. 구파는 친일 지주가 주축이었고, 신파는 창당 때 합류한 친일 관료가 핵심이었다. 청년 김영삼은 구파, 김대중은 신파의 신예였다.

한민당은 이승만을 추대하려 했지만 이승만의 거부로 실패한 뒤 해방 직후 줄곧 이승만과 보수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승자는 더 영악했던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무시한채 1945년 가을 박헌영과 자주 만났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관철시켜야 하는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박헌영은 미군정과 만나 신탁통치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 중장은 한민당 송진우를 만나 신탁통치에 양해와 잠정적 지지를 얻었다. 송진우는 백범에게 이를 설명했으나 백범은 크게 분노했다. 송진우는 김구를 방문한 바로 그 날 암살됐다. 미국은 군정 관철에 박헌영을 이용했지만 공산당을 용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틈을 이승만이 꿰차고 들어왔다. 인기 없던 한민당도 난처해졌다. 1945년 겨울 우리 신문은 ‘한민당 집단탈당’ 뉴스를 연이어 전했다.

▲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원래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 배를 탈 수 없었다. 둘 사이엔 토지개혁이란 큰 강이 흘렀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미군정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계획했고 이승만 정권이 집행했다. 당시 토지개혁은 3정보(약 1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해 대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없앴고 지주들 정당이었던 한민당은 이승만 정권과 갈라섰다. 이승만이 하고 많은 이들 중에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걸 보면 알 만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반세기 전 한민당을 타산지석 삼아 집권 중반기의 위기를 극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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