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정부와 국회에서 논의 중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방안에 대해 현장 노동자들을 과로사 위험 환경으로 내모는 ‘재계 청부 입법’이라며 노동계와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13일 오전 정의당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탄력적 근로시간 단위기간 확대에 따른 피해사례 간담회’에 참석한 오세윤 화학섬유식품노조 네이버지회장은 “게임업계에서 크런치 모드(Crunch Mode)는 일상”이라고 말했다. 크런치 모드 IT업계 노동자들이 건강과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장시간 연장근무 하는 것을 말한다.

오 지회장은 “‘사람을 갈아 넣지 말아라.’ 크런치 등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IT 노동자들의 목소리”라며 “만약 탄력적 근로시간제 기간이 (현행 최대 3개월에서) 6개월이나 1년으로 확대되면 300인 이상 업체는 주 64시간, 이하인 업체는 80시간까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그만큼 늘어나 노동자들 몸에 큰 무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 지회장은 “게다가 탄력근로제는 교대근무를 할 때 수당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순번일 때 기준 노동시간을 늘려 비상근무에 대한 수당을 최소화 하려고도 한다”며 “업계의 요구만을 듣고 이런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IT의 노동자들은 또다시 대가 없는 노동을 강요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왼쪽)이 지난 9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서 열린 양대노총 위원장 주요 현안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양대노총은 국회가 추진하고 있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공동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사진=민중의소리
▲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왼쪽)이 지난 9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서 열린 양대노총 위원장 주요 현안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양대노총은 국회가 추진하고 있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공동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사진=민중의소리
전문가들도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이 확대되면 사업주들이 임금 절감 수단으로 악용될 뿐 아니라 현행법에서 금지하는 장기 과로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훈 노무사(노무법인 동인)는 이날 간담회에서 “단위기간이 6개월·1년으로 확대될 경우 분기(3개월) 이상 단위기간을 주기로 수요가 변화하는 산업으로 탄력근로제 확대가 예상된다”며 “사업주에겐 단위기간 1년 확대 시 연간 최대 312시간의 연장근로에 대한 가산임금 지급 의무가 면제된다”고 설명했다.

이 노무사는 “또 주 64시간(소정근로시간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이 3개월 이상 지속 가능한데,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평균 64시간)의 장시간 근로의 경우 뇌심혈관계질환의 발병과 강한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 정도만 확대해도 12주 64시간 근로시간이 발생해 산재보상법에서 인정하는 과로 병 발병률 기준을 초과한다. 단위기간 확대는 근로시간 단축과 산재 발생을 예방하겠다는 정부 정책과 역행해 노동자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안대로라면 실제 여름에 열악한 조건에서 에어컨 설치 등을 하는 전자제품 서비스 노동자들도 한 분기를 단위기간으로 해서 탄력근로제 도입이 가능해진다. 곽형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대표수석부지회장은 이날 현장 사례를 발표하며 “우리는 또 가정과 주말을 빼앗기게 생겼다”고 성토했다.

곽 부지회장은 “여름에 우리는 주로 밖에서, 옥상에서,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장시간 근로하며 순간순간 미끄러지거나 어딘가 찢어지고 다친다. 실제 나도 5층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고 과로사, 추락사하는 동료들이 있다”며 “그렇게 위험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가고 있었는데 탄력근로제 도입은 한마디로 이 모든 걸 무산시킬 것”이라고 했다.

지난 2015년 3월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한 상가 건물 3층 외벽에서 에어컨 설치기사가 안전장치 없이 실외기 거치대 위에서 작업하는 모습.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지난 2015년 3월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한 상가 건물 3층 외벽에서 에어컨 설치기사가 안전장치 없이 실외기 거치대 위에서 작업하는 모습.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서우석 대한항공 지상조업 민주한국공항지부 홍보부장은 “공항 내의 여러 조업사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탄력적 근무제가 1년 12달 자동으로 연장돼도 아무런 근로감독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며 “지상조업의 특성상 비행기 연착과 기상상황에 따라 불규칙한 연장근무가 발생해 회사가 탄력적 근무제 단서 조건인 평균 주당 40시간 기준을 준수하지 않고 작업 지시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고발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찬 겨울에 새벽 출근 후 사망한 노동자 또한 사망 직전 3개월 탄력적 근무제를 적용하고도 평균 연장 시간은 50시간이 넘었다”며 “방송 산업이나 계절에 집중되는 업종, ICT 업종 등은 특정일의 장시간 노동이 강요되고 노동 강도가 높아지면서 연장근무수당 손실이 발생할 수 있어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가 시행된) 7월 이후 방송스태프 지부 조합원 291명에게 근로시간 설문조사를 했는데 일평균 노동시간은 19.4시간이었다”며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촬영 현장 90%가 일용직인데 (일 한도가 없어) 일당 외 추가수당도 전혀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탄력근무제 단위기간이 확대되면 중소 규모와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 피해가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훈 노무사는 “취업규칙 도입 시 ‘불이익변경’ 절차 명시, 근로자대표 서면합의 요건 개선 등의 피해 최소화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중소, 미조직 사업장 노동자들이 임금 손실과 건강권 침해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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