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선왕(先王)들은 매일 새벽녘에 조당(朝堂)에 앉아서 정사를 듣다가 물러나서 소침(小寢)으로 가서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궁중 깊숙이 거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아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은 1477년(성종 8) 11월 26일 효령대군의 증손자이자 사림(士林)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던 종친(宗親) 이심원(李深源)이 성종에게 올린 상소의 일부분이다. 이심원은 상소를 올리면서 성종에게 개인 집무실과 같은 작은 전각을 지어 그곳에서 주로 거처하면서 공부와 업무를 보면서 신하들을 자주 만나라고 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왕의 집무실은 편전(便殿)이다. 왕의 공식적인 업무는 조참(朝參: 매월 4회 이루어지는 조회)이나 상참(常參: 매일 아침 이루어지는 약식조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신하들이 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주요 국정현안을 보고하는 자리이다. 허나 인원수가 많기 때문에 비교적 공간이 큰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상참은 창덕궁의 선정전에서 많이 행해졌다. 그런데 왕은 공식적인 조회나 회의 외에 따로 업무를 보는 일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왕에게는 집무실이자 휴게실겸 서재가 필요했다. 이심원이 별도로 작은 전각을 지어서 그곳에 거처하기를 청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한 곳이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이다. 학계에서는 선정전 같은 곳을 대편전, 희정당을 소편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왕이 거처하는 곳은 대편전, 소편전, 잠을 자는 침전(寢殿)으로 구분된다.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의 국무회의실이 대편전, 대통령 집무실이 소편전, 관저는 침전인 셈이다.

▲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0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중에서 대편전인 선정전(빨간색 원) 근처에 소편전인 희정당(노란색 원)이 보인다. 사진=고려대박물관
▲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0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중에서 대편전인 선정전(빨간색 원) 근처에 소편전인 희정당(노란색 원)이 보인다. 사진=고려대박물관
소편전이라고 할 수 있는 희정당은 왕의 개인 집무실로 정착돼갔다. 이곳에서는 업무뿐만 아니라 왕의 공부인 경연(經筵)이 열렸다. 특히 왕을 성인이 되도록 만드는 경연에서는 공부뿐만 아니라 국정 현안에 대해 심도 높은 회의가 열리기도 했고, 임금과 신하가 편하게 술도 마시며 군신간의 정(情)을 쌓기도 했다. 당시 이심원이 별도의 전각을 만들어 거처하라고 한 이유는 왕의 효율적인 업무 수행을 바라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밤낮없이 경연을 열어 왕을 성인(聖人)이 되도록 이끄는 한편, 환관과 후궁 및 자신의 고모부로서 간신 짓을 일삼던 임사홍과 훈구파로부터 왕을 떼어 놓으려 했던 것이다.

요즘 대통령의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논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출퇴근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면서 투명한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구중궁궐과 같은 청와대에서 나오겠다는 말이다. 대선 공약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경호와 의전 등으로 출퇴근하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 할 수도 있으며 이미 있는 국무회의실, 집무실, 비서실, 부속실 등을 또다시 만드는 것은 예산 낭비일 것이다. 집무실이 어디건 국민들은 일 잘하는 대통령을 바란다.

▲ 청와대 전경. ⓒ 연합뉴스
▲ 청와대 전경. ⓒ 연합뉴스
차라리 청와대를 세종시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의 관저가 바로 청와대 자리에 있던 경무대였기 때문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그 이름을 바꾸었지만, 자리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행정중심도시인 세종시와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대통령이 멀리 떨어져 매우 비효율적인 모습이다. 청와대부터 세종시로 이전한다면 정부 및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명분도 서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 후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는 천년역사문화관광벨트를 조성하고 그 중심에 있는 DMZ를 세계평화와 자연생태보호구역으로 조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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