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조선일보는 김선수 변호사의 대법관 지명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조선일보는 ‘코드 냄새 물씬 나는’(7월3일), ‘통진당 변호했던 김선수’(7월23일), ‘하나회 보다 더한 진보판사 모임 사법부 독식’(8월31일) 같은 제목으로 그에게 색깔론을 덧칠했다.

1988년 고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로 출근한 김선수 변호사는 노태우 정부가 휘두르는 공안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모토로라, 풍산금속, 금성전선 등 빗발치는 시국사건을 맡으며 힘 없는 노동자 곁을 지켰다.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은 겉으론 민생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민주화운동과 노조 탄압이었다. 폭력의 시대가 낳은 역사의 현장과 정면으로 마주해 30년을 버텨온 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 지난 8월2일 오전 김선수 신임 대법관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김선수·이동원·노정희 대법관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지난 8월2일 오전 김선수 신임 대법관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김선수·이동원·노정희 대법관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여기 또 한 사람의 대법관 얘기가 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난 셀리나는 1944년 미국 시민이 되려고 미 육군에 들어갔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6년 결혼해 뉴욕에 정착했지만 아이 낳을 형편은 아니었다. 남편 소토마요르는 자동차정비공이었지만 무능했다.

셀리나는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장을 따고 병원에 전화 교환원으로 취직했다. 셀리나는 1954년 6월25일 첫 아이 소니아를 낳은 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 딸 소니아는 8살에 소아당뇨병 진단을 받고 평생 이 병을 안고 산다. 소니아가 9살 때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숨졌다. 9살 소니아는 목요일 밤마다 TV로 법률 드라마 ‘페리 메이슨’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셀레나는 딸 소니아와 아들 후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동네는 점점 거칠어졌다. 사우스 브롱크스는 무장한 갱과 마약상이 늘어나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집주인들이 아파트를 불태우고 보험금을 챙길 정도였으니.

셀리나는 간호조무사 월급으론 딸과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셀리나는 대학 정규 간호사 학위과정에 등록했다. 셀리나는 주말엔 병원에서 일하며 대학에 다녔다. 정규 간호사 자격으로 병원에 돌아간 셀리나는 1985년 그 병원이 문 닫을 때까지 다녔다.

딸 소니아는 1974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다. 소니아는 백인 중심의 대학에서 난생 처음 소수자 경험을 했다. 소니아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으로 프린스턴에 입학했다. 우리의 사회적 배려자 전형쯤이다. 1974년 프린스턴 입학생 1,127명 가운데 라티노는 22명에 불과했다.

소니아는 한 토론회에서 “저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산물입니다. 제 SAT 점수는 대학 동기보다 못했지만 대학 공부를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니아는 프린스턴 첫 학기 동안 위축돼 기숙사에 틀어박혔다. 소니아는 명문고 출신보다 특히 작문 실력이 크게 모자랐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기에 영어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소니아는 어머니를 보며 용기를 냈다.

소니아는 1976년 예일대 로스쿨로 갔다. 로스쿨 때 소니아는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는 남편 케빈과 결혼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결혼반지를 팔아 이혼상담을 해준 변호사의 보수를 지불해야 했다. 소니아는 1978년 10월 대형 로펌 쇼 피트먼의 채용면접을 봤다. 여기서 소니아는 인종차별 질문을 받고 이의를 제기했다.

▲ 소니아 소토마요르 (Sonia Maria Sotomayor). 사진=위키백과
▲ 소니아 소토마요르 (Sonia Maria Sotomayor). 사진=위키백과
오바마 대통령의 지명으로 2009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이 된 소니아 소토마요르 얘기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맞선 소니아가 지명 후 청문과정에서 들었던 가장 과격한 언론 보도는 ‘행동주의 판사’(윌스트리트저널) 정도였다. 소니아는 트럼프 광풍에도 여전히 소수자 편에 선 대법관으로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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