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등 4명이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상고심에서 “이씨 등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송제기 후 13년8개월 만에 나온 결론이다.

재판의 쟁점은 두가지다. 첫째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있는가다. 대법원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를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및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피해자 개개인이 청구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번째 쟁점은 손해배상 책임을 외면한 일본 판결이 국내에서도 같은 효력을 갖는지였다. 전원합의체는 일본 판결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임을 전제하고 내려진 판결이라며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일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 31일 경향신문 1면.
▲ 31일 경향신문 1면.

이날 원고 가운데 재판부에 출석한 이는 이춘식씨 1명 뿐이었다. 13년 넘게 재판이 이어지는 사이 다른 원고인 여운택, 신천수, 김규수씨는 세상을 떠났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춘식씨는 판결 직후 “혼자 재판 받은 게 많이 아프고 눈물도 나고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 사람들은 복이 없는가. 같이 재판을 못 받은 게 서럽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다시 주목받는 양승태 사법농단

이날 전국단위 종합신문들은 1면에 이 소식을 나란히 게재하면서 주목했고, 선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신문마다 관점은 미묘하게 갈렸다.

이 재판은 13년8개월 만에 결론이 났다. 다수 언론은 재판이 늦어진 배경으로 사법농단 사건의 장본인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지목했다. 경향신문은 “양승태 대법 ‘강제징용 재판’ 전원합의체서 뒤집으려 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한일 외교관계를 우려한 박근혜 전 대통령 뜻에 따라 선고를 미루고,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이 주도해 앞선 대법원 선고를 뒤집으려 했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 사건이 사법농단의 상징적 사례가 된 만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주도한 재판거래의 전모가 투명하게 밝혀져야 이번 판결의 의미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일보도 “사법농단 의혹 몸통 수사와 진상규명의 필요성도 그만큼 커졌다”고 밝혔다. 한국일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청구권 포기와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 때의 재판 고의지연 의혹을 딛고 강제징용 배상 책임이 인정됐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도 언급했다.

양승태 대신 노무현 부각한 조선일보

반면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양승태’라는 단어를 없었다. 같은 보수신문인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특히 그 자체에 우리 사법부가 일조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고 밝힌 것과 대조적이다. 대신 조선일보는 기사와 사설에서 ‘노무현’ ‘문재인’ 두 이름을 부각했다.

조선일보는 “양승태 대법원, 5년 지연시켜... 그 사이 피해자 3명 사망, 노무현 정부 ‘65년 협정으로 보상’... 관련 소송 자취 감춰”기사를 내보냈다. 부제는 “불거지는 역대 정부 책임론” “노(무현) 정부 견해 결정한 위원회엔 당시 문재인 수석도 참여”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 31일 조선일보 보도.
▲ 31일 조선일보 4면

“문재인 정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는 ‘강제징용 보상이 청구권 협정의 무상자금 산정에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법에 의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관련 소송이 노무현 정부 발표 이후 2012년 대법원의 원심 파기까지 한 건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그 사이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역대 정부에 책임이 있다면서도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겨눈 보도다.

한일관계 우려하는 보수신문

또 다른 차이는 ‘경제적 우려’에서 나타났다. 이번 판결로 수 많은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과거 총리실이 파악한 강제징용 피해자는 15만명에 달한다.

보수신문은 이어지는 소송으로 한일관계가 경색되는 점을 우려했다. “일본 경제계, 한일관계 악화 땐 한국지사 폐쇄도 검토”(조선일보) 기사가 대표적이다. 또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한일관계가 또 격랑에 휩싸였다”며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되 한일간 신뢰를 다시 쌓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위안부 피해 합의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미 (한일이)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기도 하다”며 “두 나라 모두 미래를 봐야 한다. 경제, 국제정치, 안보 면에서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이웃 나라”라고 지적했다.

반면 한겨레는 “일각에서 양승태 대법원 재판 지연의 불가피성을 부각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 일본의 강경대응 가능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며 “그러나 한국의 동의 없이는 법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3권 분립의 민주국가에서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이 존중돼야 함은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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