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말을 듣고 있기도 버겁습니다. 저 여기 있거든요. 반대하시나요?”

지난 27일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에 시민 패널로 참여한 성소수자는 이른바 ‘동성애 반대’ 의견을 펼치는 패널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이날 토론에는 찬성 측으로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가, 반대 측으로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과 조영길 변호사(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 전문위원)가 출연했다.

방송이 나간 뒤 성소수자‧인권 단체들은 공영방송 KBS가 성소수자 혐오를 여과 없이 내보냈다고 비판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8일 “기획, 패널, 쟁점부터 혐오가 깔려 있던 방송에서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진 혐오의 전시는 예견된 것이었다”며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밝힌 시민 참여자를 포함해 다수의 시청자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조영길, 이언주 두 패널은 끊임없이 동성애는 비정상·부도덕한 것이라는 혐오 표현을 쏟아 냈고 언론을 통해 검증이 완료된 가짜 뉴스를 들어 사실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했다.

▲ 지난 27일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제정' 갈무리.
▲ 지난 27일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갈무리.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무지개행동)은 29일 “해당 방송의 성소수자에 대한 얕은 이해, ‘너도 옳고 나도 옳다’ 식의 방향성 없는 기획, 숫자만 동일하게 맞추면 공정하다는 기계적 발상에서 선정된 수준미달 패널로 인해 보편적 인권을 부정하는 발언과 가짜뉴스가 여과 없이 송출되면서 방송 목적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며 “KBS는 차별조장이 아니라 모두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에 이바지해야 할 공영방송의 책무를 되새겨보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비판이 빗발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날 토론이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찬반의 영역에 밀어 넣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선 주제 영상은 퀴어 문화축제와 이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의 집회 영상을 동등한 비율로 보여주며 “풀리지 않는 축제 동.성.애”, “한국 사회의 신념, 가치관 문제 성소수자 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토론의 소주제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후천적으로 결정하는 것인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것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가 의제로 설정됐다. 퀴어문화축제, 차별금지법, 동성혼 등 각기 다른 층위의 사안들은 단어로서 흩어지는 데 그쳤다.

실제 이날 차별금지법 제정, 나아가 ‘동성애 반대’를 주장한 패널들의 발언은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데 집중됐다. 조영길 변호사는 “수많은 동성애를 했던 사람들이 탈동성애 사역을 수없이 한다. 전환 사례를 볼 때 불가능하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소수자와 동성애를 동성 간 성행위로 규정하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 치부하는 발언도 그대로 방송됐다. “동성애 포르노를 보고 동성애를 시작했다는 사람들이 많다”(조 변호사)거나 “동성 간 성행위 문제는 판단의 영역 혹은 윤리나 종교의 영역 관점이 있다”는 식이다.

사실과 다른 주장도 여과 없이 방송됐다. 대표적으로 질병관리본부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동성애가 에이즈를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주장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종교적 양심이 침해된다는 주장 역시 허위 사실이다. 이날 동성애 반대 주장에 목소리를 높인 이 의원이 발의자로 참여했던 지난 2013년 차별금지법안 요지는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인종, 성적지향, 성정체성 등 여러 요인을 이유로 고용이나 교육 등의 기회를 박탈해선 안 된다는 것으로 ‘종교로 인한 차별’ 또한 포함된다. 조 변호사가 차별금지법은 ‘독재법’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다 잡혀간 영국의 목사’ 이야기는 ‘동성애가 죄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닌 ‘공공질서법을 위반’해 문제가 된 사례다. 이날 토론만을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 지난 27일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제정' 편에 출연한 패널들. 왼쪽부터 진중권 동양대 교수,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 조영길 변호사. 사진=KBS 엄경철의 심야토론 갈무리
▲ 지난 27일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제정' 편에 출연한 패널들. 왼쪽부터 진중권 동양대 교수,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 조영길 변호사(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 전문위원). 사진=KBS 엄경철의 심야토론 갈무리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KBS의 이 같은 토론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인권을 신장하며 민주주의 기본 질서의 정착에 앞장선다’는 KBS 방송편성 규약과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집단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는 방송법의 정신이 완전히 실종된 방송”이라고 지적하며 “제작진을 비롯한 방송 책임자들은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공영방송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혐오발언의 ‘스피커’가 되는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상당수 여론이 존재하면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데는 공감한다. 다만 예상되는 혐오표현을 어떻게 걸러내고 품격 있는 토론이 이뤄지도록 할 것인가라는 부분은 제작진 역량과 프로그램 평가로 이어지는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생방송을 할 때는 인권침해, 욕설, 막말 규제를 위해 노력한다. 특히 공영방송이라면 아무리 찬반 토론이라도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 진행자인 엄경철 KBS 취재주간은 “처음 제작진이 토론 주제를 정한 배경은 혐오 표현이나 차별은 안 된다는 이야기를 공론화하려는 것이었다. (동성애 관련) 토론 자체를 안 보려는 분들이 있고 ‘터부’시 되고 있기 때문에 수면 위로 적극적으로 꺼내자는 의지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엄경철 주간은 “진행자로서 뒷받침하지 못한 부분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과한 표현이 있을 때 팩트체크가 있어야 하는데 패널들이 서로 논박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며 “공영방송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 책무가 있고 당연히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좀 더 조심스럽고 민감하게 대처했어야 하는데 성소수자 분들이 상처 받았다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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