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오면 놓아주겠다”

가수 에일리의 노래 제목 같은 이 말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입에서 나왔다. 문재인 정부 취임 초부터 각종 행사 연출을 도맡아온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이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 6월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를 만류하며 나온 임 실장의 발언은 자못 문학적이기까지 했다. 상당히 옛날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일들이 많았다는 것, 더불어 문재인 정부를 향한 민심이 이제 농담으로 눙치고 넘어갈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 그 방증이다.

▲ 지난 9월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국군의날 미디어데이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선임행정관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지난 9월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국군의날 미디어데이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선임행정관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임종석 실장이 탁 행정관에게 ‘가을에 남북정상회담 등 중요한 행사가 많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일해 달라. 첫눈이 오면 놓아주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남북정상회담도 했고 눈도 왔지만, 탁 행정관의 거취는 묵묵부답이다. 이러다 내년 벚꽃이 핀다면 임 실장은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뭉개고 버틴 게 된다.

이번엔 임 실장의 ‘자기 정치’가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17일, 비무장지대를 시찰하던 중 선글라스를 끼고 의전을 받는 모습을 보고 야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대통령의 순방 중 국가정보원장, 국방부장관, 통일부장관을 대동하고 했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이 있는 자리였다면 실장의 존재가 자연스러웠겠지만 분명 튀는 장면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기자들의 잇단 질문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임종석 실장이 자기 정치를 했나”라고 오히려 반문하며 “그(주장에) 자체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에서 비서실장 임명 당시를 제외하고 그의 발언과 행동에 대변인이 브리핑하는 것 또한 낯선 풍경이다.

▲ 지난 10월17일 임종석 비서실장이 철원 화살머리 고지를 방문한 모습. 사진=청와대 제작 영상
▲ 지난 10월17일 임종석 비서실장이 철원 화살머리 고지를 방문한 모습. 사진=청와대 제작 영상
임 실장은 2018년 차기 리더 순위(시사저널)에서 3위를 기록하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여의도에 입성한 전-현직 국회의원들 가운데 ‘용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기 정치’가 돋보일 수 있다면, 조직에 해가지 않는 선에서 어필할 수 있을 때 하기 마련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대신 임 실장을 먼저 만난 건 그의 위치가 단순한 비서실장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제는 그런 대중 정치인이 됐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둘러싼 대내외 지표가 좋지 않다. 코스피가 22개월 만에 처음으로 2000선이 붕괴했다. 코스피 붕괴 조짐은 북미 관계가 교착상태로 빠져들 때부터였으나 정부의 대책은 늑장이라는 게 투자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올해 봄, 무엇을 해도 될 것만 같은 상황에서 이제 국민들의 볼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 순방과 올해 일련의 일정들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조차 ‘남북관계’에만 올인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들게한다. 경제, 외교, 안보 등에서 내각보다 청와대가 센 조직으로 비치는 시점에 임 실장의 인기는 되려 독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신중한 발걸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 대통령의 그런 점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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