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현재까지 생존자’이지, 언제 그런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저는 가정폭력뿐 아니라 검경과 법원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지난 22일 강서구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40대 남성이 이혼한 전 아내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피의자 김아무개씨는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피해 여성은 피의자 김씨와 4년 전 이혼했으며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인권단체와 가정폭력 피해당사자들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정부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법 제도가 피해자 인권보다 ‘가정 지키기’를 우선시한다는 지적이다.

▲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인권단체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인권단체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인권단체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인권단체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참가자들은 국가가 가정 내 폭력행위를 제지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다고 비판했다. 가정폭력이 발생하면 법원은 퇴거나 접근금지 같은 임시조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어겨도 과태료를 매기는 데 그친다. 검찰이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실에 제출한 ‘가정폭력 접수 및 처리현황’을 보면 지난해 가정폭력 사건 기소율은 9.6%다. 구속률은 0.8%다. 대체로 처벌이 가벼운 음주운전(도로교통법 위반) 사건의 기소율은 45.7%다(2016년 기준, 대법원 통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3월 한국 정부에 ‘가정폭력 범죄자를 형사처벌하고,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면 의무체포하는 정책을 도입하라’고 권고했다.

주최측은 “신고해도 격리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도망 다니느라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피해자 이씨는 생전 10여 차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6차례 거주지를 옮겼다. 개명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진 ‘여성인권실현을 위한 전국가정폭력상담소연대 준비위원회’ 위원은 “피해자의 삶은 경찰 신고도, 보호시설 피신도, 이혼도 소용없이 물거품이 됐다”고 했다. 주최측은 “지난 9년(2009~2017년) 간 언론 보도를 세 보면 남편·애인 등 남성 파트너에 의해 최소 824명의 여성이 살해됐다”며 “보도하지 않은 사건을 합하면 숫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15년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현재까지는 생존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참가자는 “전 남편의 칼부림에 숨진 사건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이 참가자는 “두려움에 떨며 경찰을 부르면 ‘왜 이런 일로 부르냐’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단 1건의 상해만 재판에 넘겨졌지만 고작 징역 1년에 집행유예라는 솜방망이 처벌이 나왔다”고 했다. 이씨의 딸 김아무개씨는 지난 2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피의자 김씨가) 우리와 이모들에게 ‘죽이고 6개월만 살다 나오면 된다’는 말을 수시로 해왔다고 밝혔다.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고발하는 퍼포펀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고발하는 퍼포펀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고발하는 퍼포펀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고발하는 퍼포펀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참가자들은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망사건이 반복되는 이유가 현행법에 있다고 짚었다. 20년 전인 2007년 제정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이다. 가정폭력처벌법은 1조에서 그 목적을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이라고 규정한다.

가정폭력처벌법 9조는 이 목적에 따라 가정폭력 사건을 형사처벌하는 대신 ‘사건의 성질과 동기 등’을 고려해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9조 2항 ‘상담조건 기소유예’ 제도가 그 일환이다. 가정폭력 행위자가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한 조항이다. 가해자는 폭력의 경중과 관계없이 즉시 가정으로 돌아가며, 처분 흔적은 남지 않는다. 주최측은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검찰은 사건의 약 40%를 상담조건 기소유예하거나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했다”며 “이 때문에 가정폭력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3월 한국 정부에 가정폭력처벌법의 주 목적을 ‘가족의 안정보장’으로 고치거나 범위를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상담조건 기소유예 제도도 폐지하고 화해 및 조정 제도 사용도 금지하라고 밝혔다.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29일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참가자들은 국회가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하고 정부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정부가 법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피해여성의 인권보다 폭력현장인 가정을 보호한다는 뜻”이라며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보호 의무에 정면으로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UN 인권위원회가 제정한 모범입법안 등 국제사회는 가정폭력이 성별에 기초한 폭력임을 명확히 한다”며 “피해자 인권을 중심으로 법을 전면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100대 국정과제로 ‘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을 꼽았다. 이 법안은 정춘숙 의원이 발의해 지난달에야 국회 첫 문턱인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골자는 여성폭력 개념을 정의하고 국가가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지원에 나설 책임을 명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그동안 국가는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에서 되도록 개입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단 입장을 보여 피해가 늘고 있다”며 법 제정을 공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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