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영국 BBC와 인터뷰했다. BBC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공영방송사다. 문 대통령은 BBC 인터뷰에 앞서 지난 9월26일 미국 현지에서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미국에서 선동매체 수준의 낮은 신뢰도를 보이며 편파방송의 아이콘이 되었으나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여서 한국 입장으로선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 대한 평가가 매우 엇갈리는 두 영향력 있는 방송사와 비슷한 시기 인터뷰에 나선 셈인데, 대통령의 답변도 답변이지만 BBC와 폭스뉴스의 상반된 질문도 눈여겨볼 대목이었다. 두 언론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방향을 엿볼 수 있어서다.

BBC는 첫 질문에서 문 대통령이 “피난민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특별히 한반도가 전쟁 위기 가운데 있는 중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고 말하며 문 대통령의 처지를 제법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때문에 문 대통령이 “전쟁의 비극, 이산의 아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답한 대목이 시청자에게 와 닿을 수 있었다.

▲ 지난 12일 BBC와의 인터뷰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 지난 12일 BBC와의 인터뷰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BBC와 폭스뉴스 모두 김정은·트럼프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BBC와 폭스뉴스 모두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인물인가”라고 물었는데, 문 대통령은 BBC와 인터뷰에서 “아주 예의바르고, 솔직담백하면서 연장자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그런 아주 겸손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고 답했으며, 폭스뉴스 인터뷰에선 “김정은 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고 말한 뒤 “비핵화에 대해서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답했다. 여기선 같은 질문에도 매체를 고려해 답변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인터뷰도 곧 ‘외교’라는 걸 인식한 결과다.

BBC의 질문은 길고 구체적이며 예의를 갖추는 식이었다. 예컨대 “지난 남북 정상회담 중에 김정은 위원장과 손을 잡기도 했고, 또 포옹을 하기도 했다”며 “일전에 인권변호사로서 그렇게 활동을 했는데, 세계적인 인권 탄압 국가의 지도자와 이렇게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것에 대해서 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라며 예민한 질문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돌려서 제기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북한도 보편적인 인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인권은 국제적으로 압박한다고 해서 증진의 효과가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가장 실질적으로 개선해 주는 방법은 남북 간의 협력, 그리고 국제사회와 북한 간의 협력”이라고 답변했다.

반면 폭스뉴스의 질문은 BBC와 달리 짧고 거칠며 공격적이고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예컨대 “대통령께서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일인가, 아니면 비핵화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은 평화다”라고 답했으며 “평화가 굳어지고 나면 어느 순간엔가 통일도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 평화의 선결조건이 비핵화”라고 강조했다. 폭스뉴스는 “주한미군이 곧 철수하기를 바라는가”라고도 물었는데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은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평화협정과는 무관하다”고 답했다.

▲ 지난 9월26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현장. ⓒ청와대
▲ 지난 9월26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현장. ⓒ청와대
비핵화 로드맵과 관련해서도 BBC는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 이미 보유 중인 약 60여개의 핵탄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반면, 폭스뉴스는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2021년 내로 이룬다는 목표가 현실적이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폭스뉴스는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하나”라고 묻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BBC의 질문에는 단계적 조치들을 차분히 설명해 나갔고, 폭스뉴스의 질문에는 “북한이 속일 경우, 약속을 어길 경우,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다. 미국으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BBC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중 누구와 일하기 더 편한가”라고 다소 짓궂은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문 대통령은 “두 분의 결단이 없었다면 비핵화 문제를 이렇게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낸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여유 있게 피해갔다. 반면 폭스뉴스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겠느냐”고 물었는데, 문 대통령은 “이제 트럼프 대통령과 저와의 관계는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완벽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BBC와 폭스뉴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는 막판에 등장했다. 폭스뉴스는 “대통령께서 언론을 탄압하고 있고, 또 탈북민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고 있다. 의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자유한국당의 주장과 유튜브로 넘어간 박근혜지지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맥락고려 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아마도 한국의 역사상 지금처럼 언론의 자유가 부가되는 그런 시기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가짜뉴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왜곡된 비난조차도 아무런 제재 없이 언론이나 또는 SNS 상으로 넘쳐나고 있고, 매주 주말이면 제 집무실 근처에 있는 광화문에 끊임없이 나를 비판하는 그런 집회들이 열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폭스뉴스는 “대통령께서 통일을 위해서 북한 편을 들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문 대통령은 “북한과의 어떤 관계 개선이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역대 어느 정부나 똑같다. 북한과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의 책무”라고 반박했다.

이어 “방금 그렇게 (나를) 비난했던 분들은 과거 정부 시절에는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대박이고 한국 경제에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선전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정권이 바뀌니까 또 정반대의 비난을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우문현답’이었으나 질문자체에 짙게 깔린 프레임 자체가 문 대통령에게 굉장히 불리한 것이었다. 폭스뉴스는 이처럼 자극적인 질문으로 상대를 도발시키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다. 폭스뉴스의 이러한 스타일을 벤치마킹한 곳이 한국의 TV조선이다.

BBC 인터뷰의 마지막은 달랐다. BBC기자는 지난 평양 방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선물로 준 풍산개를 직접 본 뒤 둘 사이가 이런 선물을 줄 정도로 돈독해진 것 같다고 말했고,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변에서 9월19일 능라도 연설에 대한 소회를 밝힐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평양의 15만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아주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시 하나다’라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고 말했으며 “김정은 위원장이 그 연설을 전하면서 아무런, 말하자면 조건을 달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 달라거나 어떤 말은 하지 말아달라거나 이런 아무런 요구가 없었다. 사전에 연설 내용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폭스뉴스에선 ‘자유한국당’발 가짜뉴스에 대응해야 했으나, BBC인터뷰에선 “능라도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다”는 매우 중요한 대목을 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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