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나면 빨리 개입하고 빨리 종결해 달라. 잊고 지나가야 할 일인데 지속해서 회상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회사도 문제다. 무재해 운동에서 재해가 생기면 숨겨야 살아남는다. 안 그러면 페널티를 주는 구조다. 그렇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밥 먹고 살아야 하니까.”(49세 남성)

“나도 사고 이후에 휴직하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일하는 장소만 바꾸고 계속 일을 해왔다. 협력사에서 일어난 사고는 산재 처리를 못 하게 한다. 점수를 못 받으면 퇴출당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회사에서 산재 신청하라고 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고가 워낙 컸고 외부에서 다 알아버렸으니 회사에서도 저렇게 나오는 것 같다.”(59세 남성)

지난해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충돌 사고를 목격하거나 사고 수습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이후에도 악몽과 불안에 시달리며 현실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삼성중공업 사고 이후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가 제기돼 고용노동부 지시로 경남근로자건강센터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 조사를 실시했는데, 조사자 1518명(1차 847명, 2차 671명) 중 276명(18%)이 위험군이었다.

사고 한 달 뒤인 6월 실시한 1차 설문에선 161명의 노동자가 현장 목격 후 불면증과 심리적 불안 증세를 보여 PTSD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1차 조사 때 이미 회사를 떠난 이들에 대한 2차 조사는 사고 후 4~6개월이 지나고 이뤄졌는데도 여전히 115명이나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 지난해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발생한 타워크레인 충돌 사고 당시 현장. 사진=노컷뉴스
▲ 지난해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발생한 타워크레인 충돌 사고 때 현장. 사진=노컷뉴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사고 후 PTSD 위험군 판정을 받은 276명 중 산업재해를 신청해 인정받는 노동자는 10명에 불과했다. 참사 이후 42일이나 지나 조사했고, 조사 참가자들에 따르면 그나마 피해 실태가 파악된 노동자에게도 정부의 적극 지원책은 없었다.

김동철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의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기간을 살펴본 결과, 최초요양을 신청한 이들의 산재 인정 기간은 평균 105일로, 신청 후 3개월이 지나서야 산재를 인정했다.

또 최근 3년간 PTSD의 업무상 질병 처리 기한을 분석한 결과 최초요양의 경우 평균 183일이 소요돼 최초요양 신청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상병(추가상병) 처리 기한(평균 35일)보다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PTSD는 발병 당시의 상황뿐 아니라 이후의 경과를 관찰해 확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3년간 PTSD 신청 현황을 보더라도 최초요양(77건)보다 추가상병(757건)에 집중돼 있었다.

이 때문에 신청 시점의 진단만을 기준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현행 PTSD 산재 심사 방식은 재고가 필요하다.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운영 규정에는 ‘소음성 난청’의 경우 특별진찰로 재해를 확인해 소속기관에서 심의를 갈음하고 있다.

▲ 삼성중공업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 2차 조사결과. 자료=경남근로자건강센터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관련 트라우마 관리사업 결과 보고서’
▲ 삼성중공업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 2차 조사결과. 자료=경남근로자건강센터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관련 트라우마 관리사업 결과 보고서’
PTSD 산재를 인정받은 노동자가 다단계 하도급이 만연한 건설공사 노동자(32.1%)에 집중된 점도 문제다.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가 지난 9월6일 6개월간의 조사활동을 마무리하면서 고용노동부에 제출한 보고서만 보더라도 조선업 중대재해 피해자 대부분은 하청노동자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10년간 조선업에서 발생한 업무상 사고 사망자 수는 349명인데 이중 하청노동자는 257명(79.3%)에 달했다. 반면 원청노동자 사망자 수는 66명(20.4%)에 그쳐 조선업 현장에 ‘위험의 외주화’가 만연함을 보여줬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 사고 사상자는 모두 하청업체 노동자들이었다. 전문가들은 사고 피해가 컸던 이유로 원청이 좁은 공간에 많은 사내도급 노동자를 동시 투입해 작업토록 한 점을 꼽았다.

한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는 “사고 후에 원청이 처리하는 태도를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현장 바로 옆에 다른 배가 건조 중이었는데 한 달 전에 엘리베이터 사고가 있었다. 사고 후에 치료비 등을 삼성중공업이 협력업체에 다 떠밀더라”고 말했다.

정부는 노동자가 참혹한 재해로부터 겪는 충격과 불안장애를 극복하도록 관리 프로그램을 지난해 11월부터 전국에 확대 시행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 치료와 생계 지원은 부족했다.

김동철 의원은 “정부가 발표한 추적관리 등의 트라우마 관리 프로그램보다 임금 손실을 우려하는 노동자가 치료에 임할 여건을 보장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휴업급여와 치료비로 충분한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보장해야 하는데 삼성중공업 피해 노동자 지원의 정도와 행정 수준을 볼 때 제대로 된 정책이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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