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과 비난이 난무한 드라마 제작 환경, 스태프를 절대 ‘을’로써 착취해야 하는 구조가 이한빛 PD를 내몬 지 2년이 지났다. 고인이 죽음으로 알린 한국 방송 제작 환경은 2년 사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고인의 2주기 기일을 하루 앞둔 25일 오후 ‘이한빛 PD 죽음 이후 드라마 제작 현장 2년의 변화와 과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휴(休)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외래교수, 이은규 전 MBC 드라마국장, 최정기 전국언론노조 정책실장,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가 참석했다.

김동원 한예종 외래교수는 ‘시장의 성장, 노동의 추락’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한국 드라마 산업은 권력 피라미드 맨 아래 있는 스태프를 착취하는 구조가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최근 한국 드라마 시장의 특징을 △외주제작 드라마 비중 증가 △‘텐트 폴’(tent pole) 전략으로 다양성 위축 △드라마 편수 증가에 따른 리스크 증대 등으로 진단했다.

▲ 고 이한빛 PD 2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제작 환경의 변화와 과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 고 이한빛 PD 2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제작 환경의 변화와 과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김 교수는 “2017년을 지나 최근 대작 드라마는 방송사로부터 평균 총 제작비 60%를 제공받고 협찬 매출로 10~20%, 2차판권 수익으로 40% 수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제작사는 연간 예산 60~70%를 한두 편 콘텐츠에 투입하고 이로부터 나머지 콘텐츠 리스크를 상쇄하는 이른바 ‘텐트 폴’ 전략을 도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수의 대작을 텐트의 지지대처럼 삼고 있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특정 장르와 극소수 A급 출연자에 집중된 투자는 제작사 간 경쟁 뿐 아니라 마땅한 대비책 없는 리스크(risk)를 증대해 ‘도박’에 가까운 판 키우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대작 드라마 성공에 따른 기대는 충분한 기획과 수익 전략의 수립보다 드라마 편수 증가를 통한 ‘시장 키우기’로 나아가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런 구조적 위험부담이 협상력 낮은 스태프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김 교수는 “방송사별 드라마 편성 시간대가 중복돼 발생하는 경쟁은 다수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방송사로 하여금 제작비를 낮게 책정하게 만든다”며 “기획과 수익원이 확보된 텐트폴 드라마라도 늘어난 제작비는 더 높아진 출연료와 마케팅 비용, 특수효과 등에 쓰여 제작 및 후반 작업에서 각종 인건비와 비용을 절약하는 전략을 취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드라마 산업의 절대 ‘을’인 스태프들은 지난 7월 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은 “7월1일 이전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직책, 이름, 존재 자체가 없었다. 노동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해왔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김 지부장은 “그동안 우리는 젊은 스태프 동료들이 현장에서 쓰러져갈 때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었다”며 “최근에도 모 방송사 PD들이 노조 관련자는 쓰지 말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한다. 확인되면 방송사를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라 지난 7월부터 주당 노동시간이 68시간으로 제한됐지만 스태프들은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다고도 전했다. 김 지부장은 “(제작진이) 주당 근로시간 68시간을 3~4일에 몰아 제작하고 있다. 정규직은 제작일수에 대한 보상을 받고 추가수당도 받는다. 우리 같은 사실상 일용직은 임금은 줄고 노동시간은 그대로가 돼 버렸다”며 “주 68시간이 아닌 1일 12시간 총량제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팀장급 스태프들에 대한 이른바 ‘턴키’(turn-key) 계약을 개선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턴키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스태프에게 용역료 등 세부 산정 없이 총액을 지급해 팀 단위로 맺는 일괄수주계약이다. 최근 3개 드라마 제작현장 특별근로감독을 벌인 고용노동부가 팀장급 스태프들을 사용자로 판단해 논란이 됐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은 “이들은 사장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이 금액으로 4명이면 할 줄 알았는데 일거리가 많아 한 명을 고용하면 결국 내 임금을 깎아서 써야 하는 ‘사장 아닌 사장’”이라고 지적했다.

김유경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노동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김 노무사는 “노조에 불이익을 주는 움직임이 있다면 부당노동행위 처벌 대상으로 감시해야 한다. 지상파 중심의 불법파견과 위장도급이 방치돼 있다. (근로시간 단축은) 유연근로시간제라는 변형된 근로시간제로 편법 운영되는데 노동부는 연말까치 처벌유예 기간이라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고 이한빛 PD 2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제작 환경의 변화와 과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 고 이한빛 PD 2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지난 2년 동안 드라마 제작 환경의 변화와 과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이은규 전 MBC 드라마국장은 드라마 제작 현장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한 PD(감독)와 작가, 주연을 포함한 배우들 역할을 촉구했다. PD들과 협업해 지상파 방송사가 편의적으로 유지해 온 주 2회, 회당 70분, 주당 140분 편성 틀을 바꿔나가는 한편 주연급 연기자 및 연기자노동조합 등과 함께 12시간 이상 장시간 촬영 관행에 제동을 걸자는 것이다. 또한 작가협회 등 작가들을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한다면 방송사를 움직이고 PD나 연기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 전 국장은 이어 “PD, 연기자, 작가가 참여해 나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협의체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지상파 방송사와 산별교섭을 체결한 전국언론노조의 최정기 정책실장은 드라마 특별협의체 구성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최 실장은 “3사 자율합의에만 (제작환경 개선을) 맡겨선 안 된다. 정부부처가 들어와 사회적으로 통제·강제해야 한다”며 “정부와 방송사, (외주)제작사, 스태프노조와 언론노조가 참여하는 노사민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최근 문체부가 수용하겠다고 밝혀 올 하반기 내로 구성할 것 같다”고 전했다.

최 실장은 “중요한 것은 가이드라인 제정이나 운용이 아니라 강력하게 이를 지키도록 의무화 하는 거다. 패널티와 인센티브를 명확히 하고 관련 법률이나 시행령 개정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며 “편성의 구조적 변화나 턴키 관행 근절도 이 틀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고 이한빛 PD 아버지인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이날 “지난 2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며 “(방송업이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빠진 것은 촛불의 힘이라고 본다.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고 산별교섭이 이뤄지고 스태프 노조가 만들어지고 한빛센터를 만들어 온 과정에서 미약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용관 이사장은 “한빛센터를 민간이 운영하는데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다. 쉼터 운영비도 감당이 안 된다. 미디어신문고 같은 민원 요구 해결도 담당 인원이 3명에 불과해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며 “국가기관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역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