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부터 주 52시간 상한제가 실시됐지만 병원은 ‘워라밸(일과 삶 사이 균형)’의 사각지대다. 보건업은 여전히 노동시간을 제한받지 않는 5개 특례업종에 묶여 있다.

보건의료현장 내 장시간 노동이 여전했다.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의료노련)은 24일 오후 토론회를 열고 병원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시간을 줄이려면 국가가 나서 부족한 의료인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의료노련은 지난 3월 한 달간 조합원을 설문조사했다. 직종은 간호사‧간호조무사‧의료기사 등이었으나 간호사 비율이 71%로 가장 높았다.

병원에서 시간외 노동은 관행이다. 응답자 대다수(68.8%)가 ‘일상적으로 연장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3년 전 결과(68.4%)와 거의 동일한 수치다. 간호사의 경우 하루 평균 4시간 가까이 연장근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된 이유는 ‘만성적인 업무과다’였다(52%). 민송희 순천향대 부천병원노조 위원장은 “병원은 의료시설과 장비에 집중투자하나 인건비는 가장 먼저 절감한다”고 설명했다. 시간외 수당을 받는 경우는 26%에 그쳤다.

시간에 비해 업무량이 많다보니 노동조건도 열악하다. 5명 중 1명이 근무 중 식사를 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사 시간이 20분 미만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10명 중 3.6명). ‘워라밸’도 먼 이야기다. 응답자는 주어진 휴가일수 가운데 평균 65%밖에 쓰지 못했다. 다수가 ‘동료에 피해를 줄 우려’ 때문에 휴가를 다 쓰지 못했다고 답했다.

▲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은 24일 오후 토론회를 열고 병원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전국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은 24일 오후 토론회를 열고 병원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병원노동자, 그 가운데서도 간호사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본 원인은 인력 부족이다. 이수진 의료노련 위원장은 “미국의 간호인력 1인당 환자 수가 3.6명, 일본은 7명 수준인 반면, 한국은 최소 19.2명”이라며 “의료인력 부족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태움문화’와 높은 이직률 등 업계 고질병도 인력 부족에서 비롯한다. 민송희 위원장은 “간호사 한 사람이 맡는 업무 강도는 상상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병원은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곳이기 때문에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기 어렵다. 부족한 인력을 위계와 훈육으로 메우면서 인권이 무시되고, ‘태움’이 나타난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016년 새로 들어온 간호사 3명 가운데 1명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병원을 떠났다. 의료노련 설문조사에서 이직을 고려한 이유 1위는 “업무가 많아서”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미영 매일노동뉴스 기자는 “취재하면서 간호사에게 ‘사직순번제’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병원에서 퇴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한꺼번에 빠지면 동료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번호표를 뽑는 실정”이라고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간호사 장시간 노동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가 쉬운 길을 택했다고 꼬집었다. 간호대학 정원 늘리기다. 정부는 지난 8일 국무회의에서 간호학과 편입학생 비율을 현행 10%에서 30%로 늘렸다. 민송희 위원장은 “노동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수많은 빈자리를 채울 신규간호사를 충원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말했다.

발제를 맡은 김혜림 의료노련 정책국장은 “병원은 24시간 돌아가기에 획기적인 개선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기자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발의한 보건의료인력지원법안이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5년마다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을 내고 △3년마다 종합 실태조사를 실시하며 △전담기구인 보건의료인력원을 세우도록 명시했다. 김혜림 국장은 “52시간 상한제를 보건업에도 적용하는 등 법으로 정하지 않으면 해결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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