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공영방송 KBS가 남북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24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서울호텔에서 열린 2018 세계공영방송총회(PBI·Public Broadcasters International)에 참석해 “공영방송은 신뢰와 화해를 위해 노력할 의무와 과제가 있다”며 KBS 역할을 주문했다.

PBI는 세계 공영방송 수장들이 모여 공영방송 역할과 활로 등을 논의하는 연례 회의다. 이번 총회는 지난 2007년 이후 11년 만에 KBS 주관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양승동 KBS 사장 개회사로 열린 24일 행사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노웅래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축사, 우에다 료이치 일본 NHK 회장 답사, 토니 홀 영국 BBC 사장 기조연설에 이어 주제별 세션으로 진행됐다.

‘국제 분쟁지역에서의 사회 통합을 위한 공영방송 역할’을 주제로 한 특별 세션은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환영사와 정연주 전 KBS 사장의 기조연설, 데이비드 조던 영국 BBC 편성정책본부장을 좌장으로 한 패널 토론으로 이어졌다. 패널로는 카르멘 가브릴라 루마니아 ROR 유럽특파원, 이창현 KBS 시청자위원장(국민대 교수), 샐리 앤 윌슨 공영방송연대(PMA) 대표(CEO)가 참여했다.

▲ 24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서울에서 2018 세계공영방송총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 24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서울에서 2018 세계공영방송총회가 열렸다. 무대 왼쪽부터 정연주 전 KBS 사장, 카르멘 가브릴라 루마니아 ROR 유럽특파원, 데이비드 조던 영국 BBC 편성정책본부장, 샐리 앤 윌슨 공영방송연대 CEO, 이창현 국민대학교 교수(KBS 시청자위원장). 사진=노지민 기자

정 전 사장은 ‘공영방송은 신뢰 회복의 인큐베이터’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에서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세계는 더욱 촘촘해졌고 먼 곳 분쟁도 내 이웃의 이야기가 되며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며 “언론 편파보도로 인해 분쟁과 불신 증오가 격화될 때가 많다. 공영방송은 신뢰와 화해를 위해 노력할 의무와 미션이 있다”고 밝혔다.

정 전 사장은 독일 사례를 들어 통일을 전후로 한 공영방송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동독과 서독은 미디어와 문화 교류 등을 통해 통일 절차를 촉진하는 협력을 했다. 일례로 1973년 동독은 공식으로 서독 채널에 방영을 허락했고 1987년 서독 ARD를 비롯한 방송국들이 콘텐츠와 인적 교류, 공동제작 등 이니셔티브에 나섰다”고 전했다.

정 전 사장은 “북한에서 사용되는 휴대전화 대수가 500만대를 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모바일 기기와 서비스 사용하는 북한 시민 수도 늘었다고 한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남북 교류를 자연스럽게 촉진시켰으면 좋겠다. 이와 관련해 KBS가 다양한 미디어플랫폼 통해 서비스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사는 국내외를 대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방송하여야 한다’는 방송법을 언급하며 “한국 대표 방송공사로서 KBS가 역할을 다 해 한반도 갈등해결과 평화 정착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세션을 지켜본 캐나다 공영방송 CBC 관계자는 “정부의 목표가 있고 평화를 내세우려면 어떻게 시민들에게 전달해 정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 전 사장은 “미디어의 정부와 역할은 다르다. 한국은 갈등과 대립이 있을 때 항상 정치 쪽에서 시작을 했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며 “정부가 어떤 시각을 갖고 어떻게 접근하든 미디어의 기준은 균형 잡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루마니아 공영방송 ROR의 유럽특파원인 카르멘 가브릴라는 갈등의 현장에서 공영방송이 공공서비스미디어로서 역할해야 한다고 밝혔다. 카르멘은 “공영방송은 공정한 정보 요구에 반응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통해 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분쟁 관련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해 충분히 정보를 갖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며 “갈등은 평화보다 잘 팔리는 뉴스가 되기 마련이다. 공영방송은 많은 시간과 뛰어난 전문성을 들여 전체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한 정보 걸러내고 혐오 확산 막아야

허위정보가 이른바 ‘가짜뉴스’로 확산되기 쉬운 미디어 환경이 공영방송 존재이유를 보여줄 기회라는 의견도 나왔다. 카르멘은 “소셜 미디어가 뉴스 원천이 되면서 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필터링 없는 정보들은 민주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혐오와 폭력을 대중의 목소리로 둔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대중이 허락하는 목소리만 들리게 됐다”며 “너무 많은 목소리와 정보 속에서 정확하게 공정한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고 전했다.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중요성도 언급됐다. 샐리 앤 윌슨 공영방송연대 대표는 “‘평화’는 좋은 단어다. 정치적 뉘앙스가 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콘텐츠를 교환할 때는 언어에 많이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 한 명이 단어 하나만 잘못 사용해도 분위기가 역전되거나 사람들의 정서가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는 “내년에는 ABU와 함께 증오연설이나 혐오발언에 대한 단어 사용 가이드라인을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

윌슨 대표는 또한 “공영방송사들은 가장 자극적이고 먼저 보도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게 아니라 시간이 들더라도 전통적인 가치 중요시하며 맥락을 전달하고 신뢰를 강화할 수 있는 가치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며 “많은 미디어들이 긴밀하게 협력함으로써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후 세션은 각각 △플랫폼 전환과 미디어 빅뱅 △진화하는 미디어 생태계를 위한 콘텐츠 전략 △TV의 미래, 시청자를 위한 UHD 등을 주제로 한 발표와 패널 토론 등으로 진행된다.

2018 PBI 서울 총회는 25일 △연결 플랫폼 시대 공영방송의 가치와 존재 이유 △젊은 시청자를 위한 리서치 1.0에 대한 발표·토론 이후 폐회하며 각국 공영방송 관계자들은 DMZ 시찰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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