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3일 ‘9·19 평양 공동선언’과 부속합의서인 ‘남북 군사 합의서’ 비준안을 재가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가 ‘위헌’이라며 비판했다. 국회 비준 동의 절차 없이 정부가 일방 비준했다는 이유에서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남북 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 완화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더욱 쉽게 만들어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길일 뿐 아니라 한반도 위기 요인을 없애 우리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그간 불이익을 받았던 접경 지역 주민에게 가장 먼저 혜택일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북 군사합의서에는 해상 완충 수역을 설정해 포 사격과 기동훈련을 금지하고 군사분계선 주변 공중 정찰 활동을 중단하는 군사 조치가 담겨있다.

▲ 조선일보 3면 사진기사
▲ 조선일보 3면 사진기사

조선일보는 1·3면과 사설에서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사설 “국가 안위 걸린 ‘남북 군사 합의’ 정부 일방 비준 위헌 아닌가”에서 “평양 선언은 정부 말대로 4월 판문점 선언의 ‘이행 성격’이 강하다. 판문점 선언을 근거법으로 하는 부수법안인 셈”이라며 “지금 국회가 판문점 선언 비준 동의안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부속 합의 성격인 평양 선언을 대통령이 먼저 비준한 것은 스스로 본말을 뒤집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정부가 “평양 선언에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울 수 있는 내용이 없어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없다고 판단”했다고 봤다.

이날 대통령 비준에 앞서 법제처는 “평양 선언은 판문점 선언의 이행 성격이 강한데, 판문점 선언이 이미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밟고 있어 평양 선언은 따로 국회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평양 선언에 중대한 재정 부담을 수반하는 내용이 들어있지 않아 ‘남북관계발전법상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합의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조선일보는 다르게 판단했다. 이 신문도 “평양 선언 문구를 보면 ‘철도, 도로 착공식’ ‘개성공단 정상화 협의’ ‘산림 협력’ 등 당장 큰 돈이 들어갈 사업이 없어 보인다”고 봤다. 그러나 “철도, 도로 사업에만 40조원 이상 들어갈 것이란 추산이 나오는데 정부는 구체적인 공사비 제시도 없이 착공식부터 하겠다는 비준안을 의결했다”며 “이런식으로 대북 정책에 ‘대못’을 박으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24일자 조선일보 사설
▲ 24일자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전문가들 의견을 전했다.

장영수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조선일보에 “국회 동의 사안의 기준은 입법 사항인지, 재정적 부담을 수반하는지 여부”라며 “판문점·평양 선언에 일관성 없는 법 해석을 적용하면서 오해와 혼란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석연 전 법제처장 역시 이 신문에 “청와대가 평양 선언이 독자적 선언으로 효력을 갖는다고 했는데 평양 선언엔 철도, 도로 연결 착공식 등 예산 조치가 수반되는 행위가 명시돼 있다”며 “국민의 재정 부담을 수반하는 조치 등은 반드시 국회 동의를 받는 게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헌법을 인용하기도 했다. 사설에서 “특히 군사 합의서는 헌법 60조 1항이 국회 비준을 받으라고 정한 ‘안전 보장에 관한 조약’에 해당할 수 있다”며 “군사분계선 일대 비행금지와 NLL 인근 훈련 중지 등 우리 안보와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헌법 60조를 보면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 24일자 조선일보 3면 톱기사
▲ 24일자 조선일보 3면 톱기사

조선일보는 “휴전선을 같이 지키는 미국이 모두 동의했다는 공식 발표도 아직 없다”며 “국회 동의를 받지 않으면 위헌이라는 헌법학자 견해가 있다”고 했다. 군사 합의서가 ‘안전 보장’을 넘어 한국의 주권에 관한 조약이라고 보겠다는 뜻이다.

이어 “이 정부는 국가 안위가 걸렸고 위헌 소지가 있는 남북 합의서도 권력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단으로 처리한다”며 “국회가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해 헌재에 권한쟁의심판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야당에도 메시지를 던졌다.

조선일보는 법제처도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3면에서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10·4 선언에 대해선 ‘남북 정상 간의 선행 합의는 국회 비준 동의 대상이 아니며 후속 합의(총리 회담 합의서)는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며 “11년 전과 해석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김외숙 법제처장을 겨냥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6월 처장 임명 전까지 문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담았던 ‘법무법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며 “김 처장은 그간 ‘코드 유권해석’ 논란을 빚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지난 5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경호 관련 “대통령 경호처가 계속 경호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당시 문 대통령이 “경호처가 경호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를 ‘가이드라인’이었다고 전했다.

또한 문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비핵화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설에서 “현재 북 비핵화는 북이 핵 신고서 제출을 거부하고 미북 핵 실무 회담을 회피하면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는 북이 실질적 비핵화를 하고 난 뒤에 줘야 할 선물 보따리를 벌써 풀고 있다”며 “북 비핵화에서 순서가 뒤바귀면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핵 보유를 돕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다.

야당도 반발했다. 자유한국당은 헌법 60조를 거론하며 “정부가 국회 비준 동의 없이 북과 문서를 교환해 문제”라고 지적하며 교환할 경우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신청, 헌법재판소에는 국회 차원의 권한쟁의심판 소송을 추진하기로 했다.

윤영석 한국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문재인 정부가 굴종적인 대북 정책에 경도돼 국회와 협치마저 포기하고 불통과 독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개탄한다”며 “법제처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따라 비준을 결정했는데 문재인 정부의 아전인수격 법해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바른미래당도 힘을 보탰다. 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문 대통령이 평양 선언과 군사 분야 합의서를 비준하기 전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안을 거둬들이고 일괄 처리해야 했다”며 “대통령은 판문점선언을 직접 비준하는 방향으로 선회해 불필요한 정쟁에 빨리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남북 합의들이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만들 때 국회 비준 동의를 받는 것이지, 원칙·방향·선언적 합의에 대해 그렇게(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범여권에서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박경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선언으로만 끝났던 그간의 남북관계를 보다 공고히 하고 한반도에 불어오는 평화의 바람을 결코 다시는 되돌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국회의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고육지책”이라고 했다.

민주평화당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김정현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일각에서 절차 하자를 제기하지만 차일피일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을 미루고 있는 입장에서 본말이 전도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며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에 초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정의당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평양 공동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 의결로 한반도 평화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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