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이집 교사다. 하루가 멀다하게 사립유치원, 어린이집의 비리와 근절 대책이 발표되고 있는 터라 ‘어린이집 교사’라고 말하는 일이 썩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물론 이런 일이 새롭지는 않다. 불거졌다가 또 쑥 들어가 버리기 일쑤다. 

매번 어린이집이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면 보육교사들은 마치 내 죄인 양 부끄럽고 위축되고는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앞으로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첫 글이니만큼 필자가 ‘왜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지’를 설명하며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스무 살 넘어 첫 직장은 민간유치원이었다. 원장은 유치원 말고도 보습학원, 음악학원을 같이 운영했다. 유치원교사로 취업을 했지만 원장은 다른 일도 요구했다. 첫 직장에서 원장은 오전에는 유치원교사로, 아이들이 하원하고 난 후에는 보습학원 국어, 수학 강사로, 저녁에는 피아노강사로 나를 써먹었다. 아침 7시 유치원 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해 밤 9시가 되어야 일이 끝났다. 한 해를 채워갈 즈음 ‘더는 힘들어 못다니겠다’고 했다. 원장은 마지막달 월급 20만원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들어간 곳은 A대학교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제법 규모 있는 어린이집이었다. 원장은 A대학교에 출강을 했고, 교사들은 A대학교 유아교육, 사회복지, 가정학과 출신들이었다. 총무실장과 총무도 A대학교 모교수의 부인과 딸이었다. 대학교 위탁 어린이집이라는 격에 맞춰 옷을 입으라고 해서 아이들을 보기에 격에 맞지도 않는 정장을 입어야 했다. 

추석이나 설이면 교사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모 교수에게 세배를 갔다. 이 바닥에서 제법 알려져 있던 원장이지만 교사들에게는 함부로 대했다. 결국 원장에게 ‘나이도 어린 뇬이~’로 시작하는 긴 욕설을 듣고 난 후에는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학기를 마무리할 즈음 재계약을 안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됐다. 이십대 초반 짧은 사회생활동안 지나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병을 얻었다.

십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어린이집 교사가 됐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말을 걸었고, 묻고, 도움을 청했다. 나도 쉬지 않고 반응을 보이고, 대답을 하고, 도움을 주고, 또 사고가 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달이 되어갈 무렵 원장이 수업 중에 불쑥 들어왔다. 아이들 이불장을 열어젖히고는 ‘정리를 엉터리로 했다’며 이불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엉터리~’라며 나를 놀려댔다. 원장은 그렇게 아무 때나 아무 반에나 들어가 화풀이를 하곤 했다. 

어린이집은 열 두 시간동안 문을 열어야 한다. 네 명의 교사들은 이틀은 아홉 시간근무를, 또 이틀은 열 한 시간근무를 돌아가며 했다. 신입 교사가 적응하기에는 참 고되고 숨찼다. 일을 시작한 지 8개 월 만에 하혈을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대체해줄 교사가 없어서 주말을 기다리며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적응하며 1년이 넘어갈 무렵 일곱 살 아이 하나가 와서 안겼다. ‘나는 선생님 같은 어린이집 선생님이 될 거야~’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아이가 왜?, 왜 이런 일을?’ 싶었다. 지금 내가 정성껏 키우고 있는 아이가 자라서 지금 나와 같은 처지로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이 일이 부끄러워졌다. 아니 미안했다. 이 일을 계기로 노동조합을 찾아 가입했다. 뭐라도 시작하고, 해야만, 지금만큼 미안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보육현장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작하게 될 어린이집 교사라는 일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보육현장을 바꾸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진숙 부위원장이 17일 보육시설 비리 근절 대책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진숙 부위원장(보육1지부 조합원)이 17일 보육시설 비리근절 대책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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