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내부는 온통 짙은 갈색이었다. 세월호를 만지고 난 손에서는 쇳내가 진하게 났다.

단원고 2학년 7반 동수군 아버지 정성욱씨는 위태로운 갈색 미로를 능숙하게 넘나들었다. ‘4·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이기도 한 정씨는 19일 세월호 내부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부 취재팀에 소개했다. 기자들은 주춤주춤 그의 발걸음을 따랐다. 녹슨 표면을 디딜 때마다 잔재가 떨어졌다. 난간과 벽을 만지면 쇳가루가 묻어나왔다.

이날 8개 언론사 팀과 2개 다큐팀, 단원고 2학년 6반 이영만군 어머니 이미경씨가 내부 취재에 참여했다.

침몰 가속화한 5개의 문

지하 기관실을 보면 세월호가 왜 그리 빨리 가라앉았는지 알 수 있다. 세월호는 배가 넘어진 지 101분 만에 뱃머리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 당시 물은 이곳으로 급격하게 침범해 들어왔다. 세월호의 지하층은 기관실과 타기실 등 중요기관이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물이 들어오면 안 되는 구역이다.

2개의 수밀문과 5개의 맨홀은 열린 채 발견됐다. 지금도 그대로다. 맨홀은 항해 중 항상, 수밀문은 이상이 발생하면 바로 닫도록 규정돼있다. 수밀문은 어느 쪽에서 물이 침범해도 새지 않도록 설계됐다. 조타실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닫히게 돼 있다. 수밀 맨홀은 볼트로 조여져 있어야 한다.

▲ 지난 10월19일 세월호에서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이 맨홀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항해 중 개방금지'라고 적혀 있지만 발견 당시 5개의 맨홀이 열려 있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지난 10월19일 세월호에서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이 맨홀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항해 중 개방금지'라고 적혀 있지만 발견 당시 5개의 맨홀이 열려 있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내부 열려 있는 맨홀 안으로 또 하나의 열린 맨홀이 보인다. 선원들은 이 곳을 통해 타기실과 기관실을 넘나들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바닷물이 맨홀 구멍을 통해 들어와 침몰이 빨라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내부 열려 있는 맨홀 안으로 또 하나의 열린 맨홀이 보인다. 선원들은 이 곳을 통해 타기실과 기관실을 넘나들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바닷물이 맨홀 구멍을 통해 들어와 침몰이 빨라졌다. 사진=김예리 기자
정성욱 분과장은 세월호 선원들이 맨홀과 수밀문을 통로로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타기실과 기관실을 오가려면 원래는 갑판으로 올라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맨홀을 열어두고 넘나든 거죠.” 정 분과장은 “맨홀을 넘나들면 어떤지 보여주려고 직접 이곳을 통해 안내했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체조사위)는 마린과 함께 수밀문 개폐가 세월호 침몰에 미친 영향을 실험했다. 종합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수밀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면 세월호는 좌현 65도 정도의 횡경사를 유지한 채 더 오랜 시간 동안 떠 있을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는 승객의 탈출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수밀문이 열려 있던 세월호는 65도 이상으로 더 기울었고, 그때부터 배는 더 빠르게 침수되어 최종적으로 침몰에 이르렀다.”

▲ 지난 10월19일 세월호에서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은 수밀문이 열려있어 침몰이 가속화됐다고 설명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지난 10월19일 세월호에서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선체인양분과장은 수밀문이 열려있어 침몰이 가속화됐다고 설명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맨홀은 항상 닫혀 있어야 한다. 사진=김예리 기자
▲ 맨홀은 항상 닫혀 있어야 한다. 사진=김예리 기자

“에이, 일부러 이름 얘기 안 했는데.”

4층은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머문 객실이다. 희생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수습된 장소다. “이 4인실 객실 하나에서 17명이 수습됐어요. 한꺼번에가 아니라 수습한 전체 기간을 통틀어서요. 아이들 (시신)이 다른 객실에서 떠다니다가 하나 둘 이곳에 흘러들어온 거죠.” 4인실 객실은 성인 4명이 누우면 바로 꽉찰 만큼 좁았다. 남은 흔적은 10cm가량의 객실 칸막이뿐이다.

정 분과장은 수습 과정을 막힘없이 설명했다. 미수습자 수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엔 매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수습된 아이’가 발견된 과정을 설명하던 중 누군가가 이름을 알려줬다. “에이, 일부러 내가 이름 얘기 안 한 건데.” 정 분과장이 답했다.

▲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머문 4층 객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머문 4층 객실. 사진=김예리 기자
▲ 단원고 학생들 객실과 같은 층인 4층 로비. 사진=김예리 기자
▲ 단원고 학생들 객실과 같은 층인 4층 로비. 사진=김예리 기자

같은 층 복도에선 세월호의 손상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엔 사람 키만한 넓이의 복도가 바깥에 양쪽으로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좌측에 있는 복도는 없어졌다. 세월호 좌현이 바닥을 향한 채 가라앉으면서 복도 바닥이 찌그러졌기 때문이다. 현재 복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 선체 양옆으로 난 마룻바닥 복도 가운데 좌현 복도(오른쪽)는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완전히 찌그러져 나무 바닥 흔적만 남았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선체 양옆으로 난 마룻바닥 복도 가운데 좌현 복도(오른쪽)는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완전히 찌그러져 나무 바닥 흔적만 남았다. 사진=김예리 기자

고 유병언 전 회장 객실

5층엔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 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전용 VIP 객실과 갤러리가 설치된 곳이다. 정 분과장은 “이곳에 무거운 자재들이 추가 설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일부 바닥 타일만 남아 있다.

선체조사위 종합보고서는 “청해진해운은 선교 갑판 선미 쪽 전시실 내부에 인테리어용 대리석 37톤을 추가 설치했다”며 이로 인해 세월호의 무게중심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침몰 현장에서 발견된 노트북에서 나온 ‘국정원 지적사항’엔 세월호 내 유 전 회장 갤러리와 선미 객실 증개축 항목, 바닥 타일 교체 등 내용이 발견됐다.

▲ 세월호 5층 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전용 VIP 객실. 일부 바닥 타일이 남아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 5층 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전용 VIP 객실. 일부 바닥 타일이 남아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선체 증거는 앵커침몰설 일축

정 분과장은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고 싶다’고 했다. 갑판 위 앵커를 보여주며 “누군가 앵커를 떨어뜨려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지난 4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바다>는 “누군가 미리 의도적으로 내려놨던 좌현 앵커가 해저 지형에 걸리면서 세월호는 급격히 기울어 침몰했다”는 가설을 폈다.

정 분과장은 “만약 침몰 전에 (의도적으로) 앵커를 내렸다면, 지금처럼 앵커에 달린 밧줄을 도로 들어올려 감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앵커를 내리기만 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3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정 분과장은 “만약 항해 중인 배의 앵커를 내렸다면, 그 과정에서 나는 소음은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이라고도 했다.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은 “앵커를 내리기만 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3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며 “앵커를 내렸다면, 그 소음은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은 “앵커를 내리기만 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3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며 “앵커를 내렸다면, 그 소음은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은 앵커침몰설을 두고 &ldquo;만약 침몰 전에 (의도적으로) 앵커를 내렸다면, 지금처럼 앵커에 달린 밧줄을 도로 감아 놓을 수 없다&rdquo;고 말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19일 정성욱 선체인양분과장은 앵커침몰설을 두고 “만약 침몰 전에 (의도적으로) 앵커를 내렸다면, 지금처럼 앵커에 달린 밧줄을 도로 감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세월호 마지막 수색 종료

이날은 미수습자를 찾기 위한 마지막 수색이 종료된 날이기도 하다. 정 분과장은 “미수습자 수습을 하는 부분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대한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더 찾지 못한 점은 (유실 방지 등) 참사 초기 대응을 제대로 못한 데서 비롯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 승용차 등 세월호에 적재됐던 화물들이 목포신항 세월호 거치소 인근 석탄부두에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승용차 등 세월호에 적재됐던 화물들이 목포신항 세월호 거치소 인근 석탄부두에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에 적재됐던 화물들이 목포신항 세월호 거치소 인근 석탄부두에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세월호에 적재됐던 화물들이 목포신항 세월호 거치소 인근 석탄부두에 놓여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석탄부두에 옮겨진 세월호 적재 화물트럭 안에 꽃이 피어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석탄부두에 옮겨진 세월호 적재 화물트럭 안에 꽃이 피어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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