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유치원’ 1800여 곳 이름이 공개돼 후폭풍이 거센 가운데, 같은 비리가 국공립어린이집도 만연하다는 고발이 나왔다.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법 감시망을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보육1‧2지부(보육노조)는 17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어린이집 비리 사례를 소개하고 보건복지부가 근절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어린이집은 원장이 모든 권한과 정보를 독점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보육노조가 공개한 비리 내용은 급식과 물품 구매 비리, 교직원 허위 등록 등으로 총 228건이다. 이들 유형은 지난 11일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폭로한 사립유치원 적발 내용과 유사했다.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진숙 부위원장이 17일 보육시설 비리 근절 대책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진숙 부위원장이 17일 보육시설 비리 근절 대책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들 제보에 따르면 구입한 식자재의 반을 항상 원장이 가져가거나 원장 집 식비를 어린이집이 구입한 것처럼 속이는 사례가 만연했다. 서진숙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단적인 사례로 아이들 주는 간식은 절편 한쪽이나 식빵 반쪽에 그치고, 교사들 몫은 없다”며 “어린이집에선 교사도 아이들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대외용과 보관용 식단표를 따로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공운수노조는 “온라인 실태조사에 응답한 보육교사 288명 가운데 72%가량(164명)이 급식 비리로 의심되는 상황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어린이집 물품을 개인 유용하거나 구매 거래 뒤 뒷돈을 챙기는 사례도 많았다. 에어컨·공기청정기‧소파 등 시설을 어린이집 예산으로 구입해 원장 소유 물품과 바꾸거나, 원장이 집으로 가져간 뒤 감사를 나오면 ‘A/S 중’인 것으로 말을 맞춘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요한 공공운수노조 전략조직국장은 원장이 뒷돈을 챙기는 사례를 두고 “원장이 리베이트를 많이 주는 곳에서 (교구를) 구입하라고 당당하게 지시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제보 가운데 보육교사 허위 등록을 목격한 사례도 53%에 달했다. 원장의 배우자나 자녀 등을 교직원으로 허위등록해 인건비를 챙긴다는 것이다.

공공운수노조는 ‘국가가 사실상 원장들에게 어린이집 운영비를 “내맘대로 해도 되는 내 것”이라고 체득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입법부는 영유아보육법의 허점을 방치했고, 사법부는 이 맹점을 빌미로 비리행위를 사실상 용인하는 판결을 해왔다.

영유아보육법은 보육료를 유용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나, 그 사용처 등을 규제하는 조항은 없다.이 때문에 대법원은 어린이집 원장의 횡령 등 비리행위가 불거질 때마다 무죄 선고해왔다. 학부모가 내는 보육료는 ‘용도를 한정할 수 없다’는 이유, 국고보조금은 ‘보조금 전용계좌가 아니라면 그 쓰임을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2018년 보육사업안내 일부. 450쪽에 이르는 세세하고 방대한 분량이나, 지침에 그치는 까닭에 강제적용 대상이 아니다.
▲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2018년 보육사업안내 일부. 450쪽에 이르는 세세하고 방대한 분량이나, 지침에 그치는 까닭에 강제적용 대상이 아니다.

어린이집 운영 방침을 명시한 규제가 존재하지만 유명무실하다. 보건복지부는 해마다 보육사업안내 지침을 발표한다. 내용은 어린이집 설치‧운영뿐 아니라 평가인증과 예산지원, 보육 교직원의 자격‧관리를 아우르며 분량은 447쪽에 달한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의 규제는 지침에 그치는 까닭에 강제 규정이 아니다. 공공운수노조는 어린이집 원장들이 이같은 감시의 무풍지대에서 ‘소왕국’을 누려왔다고 했다.

원장의 권한이 막대할 뿐 아니라 공고한 원장들 사이 카르텔이 현장 교사의 공익제보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 부위원장은 “교사가 내부고발하면 해고된 후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러면 재취업이 불가능해진다”며 “바뀌지 않는 상황을 보면 보육교사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교사가 음식을 어쩔 수 없이 조금 주는 CCTV 장면이 오히려 고발한 보육교사를 학대자로 몰아가는 도구로 사용된다”고도 했다.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는 17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보육시설 비리 근절 대책을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는 17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보육시설 비리 근절 대책을 정부에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공공운수노조는 “이제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어린이집 운영을 책임질 때”라고 촉구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보육·장기요양·장애재활 등을 중심으로 국가가 직영하는 사회서비스공단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서 부위원장과 김 조직국장은 “얼마전 국민권익위원회는 유치원 비리를 적극 접수하겠다고 했고, 국무총리와 교육부장관도 나섰다”며 “이제는 (어린이집의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하는 단 하나의 어린이집을 만들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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