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K Drama Cliche’를 검색하면 남성이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는 장면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K drama wrist grab’이라는 제목의 각종 콘텐츠들도 쏟아져나온다. 손목 낚아채기, 기습적인 스킨십, 윽박지르기 등 남녀 사이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이 한국 드라마에서 유독 관습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한 남녀 배역들은 주로 위계상 우위에 있는 남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구도로 설정되며, 여성 등장인물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모니터링 결과가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는 16일 서울 마포구 국민TV 카페 온에어에서 모니터링 결과 발표회를 가졌다.

발표회 사회를 맡은 정슬아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연애 관계에서 스킨십을 폭력이라고 규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질 때 미디어 콘텐츠는 그에 발 맞춰 가고 있는지,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시대적 흐름과 불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차원에서 심도 깊게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16일 서울 마포구 국민TV 카페 온에어에서 한국 드라마에서 로맨스로 재현된 폭력적 장면에 대한 모니터링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16일 서울 마포구 국민TV 카페 온에어에서 한국 드라마에서 로맨스로 재현된 폭력적 장면에 대한 모니터링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노지민 기자

손목 낚아채고, 입 맞추고…‘강제 신체접촉’ 로맨스 포장

여성민우회가 모집한 40명의 모니터링단은 지난 2017년 7월에서 2018년 6월까지 지상파 3사(KBS1·KBS2, MBC, SBS), 종합편성채널(JTBC, TV조선, MBN), 유료 케이블 방송 채널(OCN, tvN) 등 9개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120개 2946편을 모니터링해 625건의 문제 장면을 분석했다. 해당 기간 드라마를 방영하지 않은 채널A는 모니터링 대상에서 뺐다.

한국 드라마에서 나타난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행위 및 태도’ 유형은 강제적 신체접촉이 57.51%로 가장 많았고 행동통제(14.07%), 스토킹(8.38%), 언어폭력(7.57%), 납치 및 차에 강제로 태워 운전(1.89%), 기물파손 및 물건 부수기(1.08%) 순이었다.

강제적 신체접촉을 세부 분석한 결과 손목이나 팔목을 잡아 돌리거나 낚아채는 경우가 34.29%로 가장 많았다. 볼이나 입에 강제로 입을 맞추는 경우(24.9%), 포옹(13.21%), 어깨 및 양 팔 제압(8.04%), 손·발 만짐(5.36%), 벽치기(3.44%), 얼굴 부위 만짐(3.25%) 사례가 뒤를 이었으며, 옷을 잡아당기거나(0.28%), 때리는 시늉(0.19%)을 한 유형도 확인됐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위계 높은 남성의 폭력성, 여성의 수동성 관습적으로 재현

폭력 행위 주체의 성별은 남성이 85.44%, 여성이 14.56%로 나타났고, 캐릭터 간 관계는 ‘쌍방향’ 로맨스이면서도 불평등한 위계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인물 관계를 분석한 결과 로맨스 관계인 경우가 45.12%로 가장 많았고, 준로맨스 관계가 31.52%, 짝사랑 관계가 23.36% 순이었다.

위계상으로는 남성 우위가 여성 우위에 비해 압도적이다. 인물 간 상하관계를 사회적 지위로 구분한 경우 남성 우위는 48.64%, 여성 우위는 5.82%로 나타났다. 연령 또한 남성 우위인 경우가 48%, 여성 우위는 9.6%에 그쳤다.

로맨스 관계에서 여성이 우위일 때보다 남성이 우위일 때 폭력 행위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특징도 두드러졌다. 남성이 위계상 우위일 경우 폭력 발생 비율은 48.98%로 여성 5.95%에 비해 8배 이상 높았다. 연령 또한 남성 우위일 경우 48.57%, 여성 우위일 경우 9.33% 폭력이 발생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폭력을 로맨스로 포장하기 위한 ‘낭만적 요소’들 활용

폭력으로 가장된 로맨스 행위를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 행위를 가하는 배역의 경우 남성의 50.80%가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했으나 여성은 8.56%에 그쳤다. 반면 상대방의 행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율은 여성의 경우 과반인 69.01%, 남성은 12.5%에 그쳤다. 남성은 자신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여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양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면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남성이 자신을 거부하는 여성 주인공을 낚아채 강제로 끌고 나가는 장면에 애틋한 배경음악을 사용하고, 극적인 화면 연출을 하는 식이다. 실제 로맨스로 가장된 폭력 장면 64.32%에 상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편집요소가 활용됐고 가장 전형적인 수단이 배경음악(94.40%)이었다. 클로즈업(3.05%), 슬로우모션(1.01%), 대사(1.01%), 내레이션(0.50%)이 뒤를 이었다.

이날 발표회에 참석한 최지은 작가는 “한국 드라마들을 보면 작가들이 시청자를 낮잡아 본다고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의 로맨스 공식이라는 게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하고 지겨울 정도”라며 “드라마는 전 연령이 접할 수 있는 문화적인 콘텐츠다. 사회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공영방송 드라마 제작자들이 책임져줬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발표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일부.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제작자들 ‘대안 고민할 기회’ 필요…대중도 적극 나서야

이소연 KBS 드라마 PD는 제작자들이 겪는 한계를 짚었다. 이 PD는 “긍정적인 장면으로만 이뤄진 드라마는 있을 수 없다. 어려움을 겪으며 인물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게 드라마 스토리의 본질”이라면서도 “너무 시간이 없고 창작자가 오랜 고민과 토론을 하기에 어렵다. 그러니까 하던 대로 한다. 다소 창작자의 게으름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대중 미디어는 ‘여성은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행복해진다’는 로맨스 규칙을 전한다. 행복한 결말이기 때문에 중간 과정은 사소한 걸로 넘어갈 이런 종류의 규칙을 대중 미디어가 반복해서 전달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양성평등 가이드라인이 이미 존재하지만 소극적인 방향을 짚는 정도 밖에는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갖기 힘들다. 관습적인 장면이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명확히 지적해야 한다. 그래야 대안을 상상할 기회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실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지난해 방영된 KBS 2TV 드라마 ‘마녀의 법정’의 경우 여성 배우를 불러 세울 때 남성 배우가 먼저 앞으로 뛰어가 손으로 막아서는 방식을 취해 ‘착한 연출’ 사례로 언급됐다.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경우 극중 인물들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무시하거나 윽박지르는 전형성에서 벗어나 차분한 대화만으로 상호 소통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두 드라마 모두 시청률 면에서도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최 작가는 “시스템과 콘텐츠를 바꾸는 데 가장 효과적인 걸 타격하는 게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대중 문화는 대중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며 “대중이 문제 드라마를 보이콧하거나 비판하는 동시에 좋은 콘텐츠에 대한 ‘영업’을 하지 않으면 변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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