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8월23일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 김창선씨(36)가 매몰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신동철 대한일보 기자는 “타사 고참기자들의 작문성 뻥튀기 기사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고참기자들은 앉아서 머리로 기사를 써 본사에 송고, 연일 톱 기사로 사회면을 장식했다. 나를 질책하는 데스크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1967년 9월5일 대낮에 김씨의 부인이 광산에 뛰어왔다. 부인은 “방송에서 정애 아빠가 구조됐다는데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잠시 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전교생이 논밭을 가로질러 환호하며 달려왔다. 이어 우렁찬 브라스밴드 소리가 났다. 가짜뉴스를 듣고 청양읍 유지들이 청양농고 취주악대를 앞세워 나팔을 불며 왔다.
TBC의 오보는 TBC로 끝나지 않았다. 신아일보는 TBC를 보고 석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김씨는 TBC 보도 뒤에도 34시간이 지나 6일 밤 9시가 넘어 구조됐다.
16일간 암흑에 갇혔던 김씨는 두 눈을 가리고 온몸을 담요로 두른채 나오자마자 구급차에 실려 갔다. ‘고맙소, 고맙소’는 기자들의 작문이었다.
우리 언론은 김씨가 갇혔던 16일 동안 낡은 갱목을 사용한 기업의 안전 불감증 대신 미담기사로 연일 시간을 떼웠다. 제목은 대부분 ‘해병 출신 투지’, ‘철인 김창선’, ‘김창선 영화화’, ‘김창선씨 명예경찰관’, 이런 식이었다.
언론이 왜 그렇게 67년 8,9월을 구봉광산에 목을 맸을까. 미담기사라서 피해자는 없을까.
앞서 그해 6월8일 총선은 대리투표, 매수, 투표방해 등 타락의 극치였다. 목포에서만 대리투표하다 잡힌 게 260건이었고, 전북 진안군은 투표율이 101.4%였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번지자 박정희는 당선된 공화당 후보 10여명을 구속, 제명시켰지만 불길은 쉬 잡히지 않았다. 때마침 구봉광산으로 전 국민의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언론은 철저히 박 정권과 유착했다. 그나마 공정했던 동아일보조차 9월7일자 호외를 포함해 보름 동안 김씨 관련기사 80여건을 쏟아냈다.
한국 언론이 금지옥엽 받드는 독립신문은 1896년 4월11일자 논설에서 “동학(혁명)을 야만의 행사”라고 폄훼했다. 창간 나흘 만에 나온 기사였다. 1899년 8월8일자 ‘태국의 중흥론’이란 제목의 사설에선 “태국이 영국인을 고문으로 맞아 도둑이 줄고 세금도 늘었다”고 했다. 독립신문의 제국주의 미화는 영국의 인도 지배나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로 식민지가 발전했다는 논리로 비약했다. 가짜뉴스는 어느 날 불쑥 태어난 게 아니다. 기자가 현장을 외면할 때 가짜뉴스는 언제든 비집고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