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생후 26개월 된 민이(가명)는 아빠랑 단 둘이 산다. 아빠는 스물아홉 살 ‘미혼부’다. 엄마는 민이를 낳자마자 출생신고도 하기 전에 아빠와 헤어졌다. 미혼부의 출생신고는 법적인 제약이 상당히 많다. 서류상으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인 민이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 둘. 영이(가명)는 일곱 살, 아래로 네 살 쌍둥이 동생들이 있다. 영이의 아빠와 엄마는 모두 장애인이다. 아빠는 허벅지 아래로 두 다리가 없다. 엄마 역시 지체장애 1급으로 전동휠체어를 탄다. 장애여성의 모성권 보장을 위한 정부의 제도는 ‘출산지원금 100만 원’이 사실상 전부다.

이야기 셋. 네 살 케빈(가명)은 국적이 없다. 케빈의 엄마는 여성 할례를 피해 고국 라이베리아를 떠난 뒤 여러 나라를 거쳐 2012년 한국에 왔다. 난민으로 허가받지도 못한 ‘난민신청자’ 신분의 엄마는 한국에서 케빈을 낳았다. 출생신고가 되지 못한 케빈은 ‘세상에 없는 아이’로 인권의 사각지대 속에서 산다.

베이비뉴스는 올 1월부터 매달 다른 주제의 특집기획 보도를 진행해왔다. 우리가 특히 중점을 둔 것은 민이나 영이, 그리고 케빈과 같은 아이들도 이 나라에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별로 인기 없는 이야기라는 것 잘 안다. 솔직히 많은 사람들에게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끔찍하게도, 기사에는 십중팔구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왜 낳았어?’라는 댓글이 달린다. 우리가 비혼출산이나 장애여성 모성권, 난민아동 인권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은 그 무자비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어디 한번 물어보자.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부모의 자격은 무엇인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부모의 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키우지 못할 아이를 왜 낳았느냐는 물음에는 국가의 책임이 삭제돼 있다. ‘애는 제 마음대로 낳아놓고 왜 국민의 혈세에 손 벌리느냐’는 비난에는 개인의 책임만 무한히 강조된다. 비겁하고 비열하다.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 사회는 지금 ‘미혼부’ 아빠와 함께 사는 민이에게 ‘그러니 너는 불행해도 싸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애부모에게서 태어난 영이에게 ‘그러니 너는 가난해 마땅하다’고, 난민 엄마에게서 태어난 케빈에게 ‘그러니 너는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989년 유엔은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했다. 한국을 포함한 200여 개국이 지키기로 약속했다. 생존·보호·발달·참여의 권리를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건, 어떤 인종이건, 어떤 종교를 믿건, 어떤 언어를 사용하건, 부자건 가난하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두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아동권리협약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이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에도 부모의 자격을 따지고, 배제하고, 심지어 비난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솔직한 ‘수준’이다. 부모의 조건으로 아이들의 행복에 자격을 매기지 마라. “돈도 실력이야, 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정유라의 말에 함께 분노했던 우리 아닌가.

인식뿐 아니라 정책도 크게 부족하다. 복지정책 설계가 변해야 한다. 부모가 처한 특수한 조건이 아니라, 아동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에 초점을 맞춘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위기가족의 ‘결점’을 보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가 어떻든 우리 사회의 모든 아동들을 직접 향하는 보편적 복지로 바뀌어야 한다.

▲ 최규화 베이비뉴스 기자
▲ 최규화 베이비뉴스 기자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왜 낳았어?’라는 댓글을 다시 생각한다. ‘왜 낳았느냐’는 질문은, 아이 입장에서 보면 ‘왜 태어났느냐’가 된다. 그런 질문을 받아도 되는 아이는 없다.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회야말로 대체 무엇을 위해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자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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