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 괴물은. 실제로 몸이 찢겨 죽었다. 옹근 400년 전의 시월,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체 온갖 점잔 떠는 ‘선비’들이 왜 저토록 험한 말로 명문가의 적자 허균을 찢어죽였을까.

오늘의 한국인에게 허균은 1200만이 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등장하는 도승지로 기억될 성싶다. 광해군이 의식을 잃자 똑같이 생긴 광대를 대리로 세운 도승지가 ‘광대 광해’를 통해 개혁을 펴나가는 영화에 관객은 호응했지만 역사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광대가 왕을 대리하는 발상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그렇듯이 가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 왼쪽 사진은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초상화. 오른쪽 사진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으로 배우 류승룡씨가 허균 역을 맡았다. 사진=위키백과. Daum 영화
▲ 왼쪽 사진은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초상화. 오른쪽 사진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으로 배우 류승룡씨가 허균 역을 맡았다. 사진=위키백과. Daum 영화
영화 속 허균이 실존 인물과 다르다고 실망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적 허균은 영화의 허균보다 더 역동적인 삶을 살았고, 마크 트웨인보다 더 민중의 사랑을 받은 소설을 남겼다. ‘홍길동’이 그것이다. 소설 못지않게 짧은 논설에도 공을 들였다. 요즘 장르로 칼럼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소로의 ‘시민불복종’보다 200여 년 앞서 발표된 ‘호민론’은 지금도 생동생동 울림을 준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민이다.” 첫 문장이다. 왕조 시대에 쓴 글임을 감안하면, 거친 선언이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 묻는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21세기인 오늘날도 그 물음은 절실하다. 묻고 싶다. “누가 민중을 두려워하는가?” 아예 ‘민중’이라는 말조차 시나브로 사라질 만큼 아무도 민중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틈만 나면 수구언론과 수구정당이 ‘종북좌파’ 따위의 굴레를 덧씌우기 일쑤인 우리 시대에 400년 전 허균의 칼럼은 눈부시다. 가령 오늘의 현실을 보자. 비정규직 850만, 농민 300만, 영세자영업인 600만, 청년실업 100만 명을 비롯해 유권자 대다수가 민중이다. 그럼에도 노동인과 농민, 영세자영업인, 청년실업자들을 무서워하기는커녕 곳곳에서 무시하는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

허균의 문법을 빌려 묻고 싶다.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천지간의 괴물’은 까닭을 ‘항민’에서 찾았다.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항민만도 아니다. “끝없는 요구를 채워주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을 ‘원민’이라 불렀다. 원민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저 원망에 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민중이 항민과 원민은 아니다. 시대를 “흘겨보다가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을 ‘호민’이라 불렀다. 소설 ‘홍길동’은 그가 항민과 원민들에게 제시한 호민의 이상이다.

허균은 또 다른 칼럼 ‘유재론’에서 “변변치 않은 나라인데다 양쪽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인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할까 두려워해도 오히려 나라 일이 제대로 될지 점칠 수 없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길을 막고는,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어’라고 탄식만 한다”고 개탄했다. 천재 허균을 질시한 권력 지향적 사대부, 고위 공직자들과 고위 언론인들은 기어이 그를 찢어 죽였다. 그 후 400년 겨레의 숱한 인재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배제되었다. 부라퀴들이 나라 일을 독점한 결과다, 나라가 망하고 지금도 분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400년 전 참혹하게 이 땅을 떠난 지식인 허균의 영전에 술 한 잔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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