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노동조합(위원장 박준동)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2심 판결을 다룬 자사 보도를 “코미디 같은 판결에 진지하게 맞장구치면 언론도 코미디의 일부가 된다”고 비판해 눈길을 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2년6개월형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 만에 석방됐다.

조선일보 노조는 지난 12일 발행한 노보를 통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판결은 언론이 기존에 보도한 내용을 깡그리 부정하는 논리였다”고 지적한 뒤 “경영 승계 시도 자체가 없었다는 ‘영구 없다’ 수준의 주장을 본지는 옹호했다”고 자사 보도를 비판했다.

▲ 조선일보 2018년 2월6일자 1면.
▲ 조선일보 2018년 2월6일자 1면.
노조는 당시 자사 보도가 “언론이 스스로를 자기 부정하는 사례”라며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항소심 선고 다음날인 6일 1면에 “이재용 ‘정경유착 굴레’서 풀려났다”는 제하의 보도를 실었고 사설에선 “피해자를 범죄자 만든 것 아닌가”라며 “뇌물이 성립되려면 뇌물을 준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강요당한 사람이 갑자기 뇌물 공여 범죄자로 바뀌었다. 희생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7일 지면에는 당시 판결을 내린 정형식 서울고법 재판장 인터뷰가 실렸고 사설에선 “국민은 삼성의 ‘사업 보국’을 바란다”며 삼성을 적극 대변했다.

뇌물액은 기소 금액(433억 원)에 못 미치는 36억 원만 인정한 결과였지만 뇌물죄 혐의를 완전 벗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조선일보는 “삼성의 사훈(社訓) 중 하나가 ‘사업 보국’이다. 이제 이 부회장이 숨 가쁘게 펼쳐지는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면죄부를 줬다.

노조는 삼성 보도 외에도 자사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보도에도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은 언론사 검열을 획책하고 국회를 무력화하는 내용이었는데 본지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며 정당화했다”며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누구를 위해 질서유지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7월11일자 사설에서 지난해 3월 기무사가 작성해 논란이 된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 문건을 “탄핵 심판 직전 상황에서 그야말로 극단적인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처 방안을 검토한 것”이라며 “헌재 결정에 분노한 쪽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문건에서 언급한 대로 정부 종합청사, 국회, 대법원, 한국은행, 국정원 등이 점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그 상황에서 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두둔했다.

▲ 조선일보 2018년 2월6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18년 2월6일자 사설.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지난 7월18일자 칼럼에서 “경찰력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군을 동원하는 것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이자 의무다. 대통령이 이런 권한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비해 군이 필요한 준비사항을 검토해 놓은 것이 계엄령 문건이다. 문건에 줄을 쳐가며 읽어봐도 국가 전복음모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썼다.

노조는 자사 보도 문제점과 관련해 지난 2월과 7월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과 박두식 편집국장에게 전달했지만 현재까지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 노조는 “노조라는 공조직을 통해 문제 제기를 했는데도 답변이 없으니 개별 기자가 논조에 대해 이의 제기를 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며 “‘네가 뭔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아’ 수십 년 간 들어온 그런 소리였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편집국 내에서 편집과 논조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향평가를 통해 기자들의 권한이 강화돼 좀 더 수평적 관계가 돼야 한다”면서 양 주필과 박 국장에게 보냈던 문건 일부를 공개했다. 노조는 “내부 비판이 노보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조합원도 있지만 이처럼 소통이 안 되는 상명하복 구조에서 공론화는 노조의 유일한 방책”이라고 설명했다.

아래는 조선일보 노조가 지난 2월 자사 삼성 보도의 문제를 지적한 내용 전문이다.

▶국민은 ‘정경유착 굴레’에 매여 있습니다.

이재용 2심 판결 다음날 1면 제목은 [이재용 ‘정경유착 굴레’서 풀려났다]입니다. 판결을 곧이곧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36억 횡령과 뇌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걸맞은 제목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날 유력 신문 1면 제목 중에 가장 이재용에게 우호적인 제목이었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기사는 판결을 스트레이트로 서술했을 뿐인데 제목이 이렇게 나간 걸 보면 편집 방침이 ‘이재용 무죄’인 것 같습니다. 사설도 ‘이재용은 피해자’라는 입장입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일반 국민들 중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정서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국민 정서에 따라 판결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본지 인터뷰에서 판사가 밝힌 것처럼 겁박을 받았더라도 30억 넘는 뇌물을 준 사람을 집행유예로 석방하는 것은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본지는 전혀 언급이 없고, 풀어주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기자들이 3만 원 넘는 식사를 대접받아도 처벌받는 시대에 너무나 형평이 맞지 않습니다. 겁박을 받아서 돈을 줬다고 주장하지만 뜯긴 돈의 수백 배 이득을 봤다면 단순히 돈을 뜯겼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동안 수백조 원대 삼성그룹을 승계 받으며 이재용이 낸 상속세는 16억 원에 불과합니다. 

▲ 조선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 조선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사실 상속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기보다는 다른 주주의 재산을 편법으로 가로채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주들 중에는 국민들이 매달 돈을 쌓고 있는 국민연금도 포함됩니다. 선진국이라면 강력한 처벌을 받거나 언론의 지탄을 받았을 행동을 하고도 건재한 것을 보면 그를 피해자라고 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승계의 막바지에 정치권력과 손발을 맞추다가 탈이 났을 뿐입니다. 또 2심 재판부는“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대담하게 주장했습니다. 모든 언론이 당시 경영권 승계 관련으로 제일모직 삼성물산 합병 분석 기사를 썼는데 졸지에 오보를 한 셈이 됐습니다. 판사가 신문을 아예 안 보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사건에선 정치권력과 뒷거래를 배경으로 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 거액의 불법 부당 대출과 같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며 80년대식 정경유착이 아니니까 정경유착이 아니라는 시대착오도 드러냅니다. 은행들이 삼성의 예금을 받으려고 로비하는 시대에 말입니다. 이런 부분도 사실 기사에서 반대 쪽 시각을 담아 균형을 맞출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번 판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데도 우리 신문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괴리를 메울 설명도 부족해보입니다. 과거 판결 보도의 경우 판결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재용 판결에 대해서는 그런 균형을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재벌만 이처럼 계속 처벌을 유예한다면 국민들은 ‘정경유착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설사 이재용이 법리적으로 무죄라고 해도 언론만큼은 비판받을 부분은 지적했어야 합니다. 우리 독자 중에서도 삼성과 이재용이 피해자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삼성의 광고 비중이 상당하지만 무조건 감싸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언론이 비판해야 할 권력은 행정부 권력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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