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국의 여행 전문지 ‘론리 플래닛’은 서울을 최악의 도시 3위로 꼽았다. 1위는 범죄로 악명높은 미국의 디트로이트였고 2위는 오염이 심각한 가나의 아크라였다.

90년대 초까지 뉴욕을 찾은 한국 여행객은 오직 사진만 찍었다. 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여행객들은 쇼핑으로 눈을 돌렸다. 요즘 한국 여행객은 좀 더 세련돼졌다. 콜럼버스 거리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신기하게도 뉴욕의 명소는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다.

걷기 쉬운 뉴욕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파리에서 서민을 몰아낸 도시개발의 전제군주 오스만 남작처럼 로버트 모제스(1888~1981)는 1930년대부터 뉴욕에 막무가내로 ‘자동차 교통’을 도입해 서민들을 몰아냈다. 악당 모제스는 사람들만 몰아낸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공동체도 함께 부쉈다. 그러나 시민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1964년 중국계, 이탈리아계, 유대계, 갱, 일반 시민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했다. 덕분에 맨하튼의 다운타운은 자동차를 막아내고 지금처럼 무사했다. 이 싸움을 이끈 이는 도시 사상가 제인 제이콥스였다. 그녀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은 ‘자동차 도시’를 비판한다. 뉴욕을 상징하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은 극중에서 단 한 번도 자동차 얘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광적인 구두 사랑으로 수다의 시간을 채운다. 왜 구두일까. 걸으려면 신발이 있어야 하고, 이왕이면 더 폼나게 걷고 싶어서다.

반면 서울에서 걷기는 고행이다. 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은 “서울은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도시와 교감하면서 편히 걸어야 진정한 도시다. 자동차 왕국 미국에서도 자동차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죄인처럼 소리를 낮추고 산다. 그러나 서울에선 상전인 듯 으스대며 도시를 점령했다. 서울의 거리는 걷는 곳이 아니라 차를 타고 지나가는 곳이 되면서 마을은 피폐해졌다. 이웃과 마주칠 기회가 줄어들고 결국 이웃과 담을 쌓고 지낸다.

2016년 기준 서울의 도로율은 22.66%이고 총연장도 8241km에 달한다. 선진국에 비해 월등하진 않지만 구색은 갖췄다. 그러나 통계는 마술을 부려 부끄러움을 덮었다. 문제는 도로의 폭이다. 12m 이하, 즉 인도가 없거나 있더라도 편히 걷지 못하는 도로의 비율이 70%나 된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폭 4m 이하 골목길도 통계상 도로다. 결국 전체 도로의 2/3가 인도가 없다. 인도가 없는 서울은 자동차라는 맹수가 들끓는 정글이다.

2009년 개장한 광화문 광장은 중간에 대폭 고쳐서 제법 광장 티를 냈지만 여전히 멀었다. 세계 어느 광장에서 콘 아이스크림 하나 사려고 편도 6차선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나. 지구상 어디에도 그런 광장은 없다. 광화문 광장을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아냥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단순히 공터가 아닌 광장이 되려면 일단 상가와 인접해야 한다. 그래서 상업시설은 광장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지난 주 일요일 서울시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제6회 ‘2018 서울 걷·자 페스티벌’을 열었다. 그 페스티벌의 출발점이 광화문 광장이었다. 광화문에서 반포한강공원까지 7.6km, 성인 걸음으로 1시간 반이면 걸을 거리인데 이런 행사 때만 걸을 수 있다. 이날 2만여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조선일보가 기획시리즈로 맹비난했던 ‘자라니’족 4000여명도 함께 했다. 페스티벌을 하면서 서울시는 ‘걷고 싶은 도시’로 거듭날 계획이라고 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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