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7일 전북기자협회가 “전북을 폄훼하지 말라”는 이례적인 성명을 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북기자협회는 “특정 해외·중앙언론의 기금운용본부 전북 이전 폄훼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며 “이들은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기금운용본부를 ‘논두렁 본부’로 표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돼지의 이웃’으로 깎아내렸다”고 주장했다.

시작은 9월11일자 미국 주요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이 1년 넘게 공석인 이유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불리함 때문이란 내용이었다. WSJ은 국민연금공단 CIO 자격 요건으로 “돼지와 가축 분뇨 냄새에 대한 관용은 필수”라고 밝혔으며 공단이 지난해 새로 자리잡은 전북혁신도시의 위치가 산과 논, 축사와 분뇨처리시설에 둘러싸여 악취 관련 민원이 다수 제기됐다고 전했다. 압권은 ‘이웃이 된 걸 환영한다’는 문구와 함께 담긴 돼지 삽화였다.

▲ 2018년 9월11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 2018년 9월11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WSJ는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해당 기사는 WSJ 서울지국 기자가 썼는데, 이 기사는 ‘A-HED’란 이름의 코너에 실렸다. ‘A-HED’ 소개 글에 따르면 WSJ는 스스로 이 코너를 ‘funny page’(재미있는 지면)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 WSJ가 돼지 삽화까지 넣은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A-HED’에 실린 이 기사를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조선일보는 팩트체크 기사에 사설까지 냈다. 이 신문은 지난 15일 “전북도에 접수된 혁신도시 악취 민원은 올해에만 195건(8월 말 기준)”이라고 보도하며 “아파트단지 2~6㎞ 거리에 가축 273만 마리가 살고 있어 바람이 불면 악취가 심하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지난 14일 ‘외국 언론에 조롱당한 벌판 속 국민연금’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세계 10대 연기금이 모두 수도나 금융 허브에 있지만 유일하게 한국 국민연금공단은 서울에서 약 200㎞ 떨어진 벌판에 서 있다. 전주 시내까지 차로 30분 걸리고, 버스를 보기 힘들 만큼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이런 곳에 글로벌 차원에서 635조원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가 있다는 것이 외국 언론 눈에도 황당하게 보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민주당은 다른 금융 공기업의 지방 이전도 추진하겠다고 한다. 금융에서 우수 인력이 이탈하고 국익에 해가 돼도 지역에서 표만 얻으면 그만인가”라고 주장했다.

▲ 전북혁신도시에 위치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노컷뉴스
▲ 전북혁신도시에 위치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노컷뉴스
그러자 전북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전북기협은 서울에 위치한 대다수 언론이 전북혁신도시를 휴대전화나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허허벌판으로 표현하거나 공단 운영인력조차 수급하기 힘든 논두렁으로 비하하며 조롱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지역에 대한 무지와 폄하 속 기득권을 지키려고 제대로 된 취재도 없이 의도된 수준 낮은 기사를 양산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며 왜곡보도를 멈추라고 요구했다.

전북일보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공모 지원자 수는 본부가 서울에 있던 2010년 12명, 2013년 22명, 2015년 18명, 2018년 1차 16명, 2차 30명”이라고 전하며 전북혁신도시 이전 후 공모 지원자 수는 늘어난 점을 지적한 뒤 “전주 이전이 본부장 적격자를 찾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WSJ의 ‘기금운용본부장 공동 숙소생활’ 보도 역시 사실이 아니며 CIO 임원급은 23평 이하의 아파트가 관사로 제공된다고 반박했다.

도지사까지 나섰다. 송하진 전라북도지사는 지난 17일 “이번 논란은 대도시와 수도권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힌 몇몇 기금운용인력과 그에 동조한 일부 언론의 편견이 빚어낸 매우 불행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전주MBC는 “전라북도는 국내외 보수 언론이 잇달아 전북혁신도시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의도가 있다며 강력히 경고했다”고 전하며 “국민연금공단은 지난 7월 본부장 공모 무려 30명이 지원했다며 조만간 인선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논란을 일축했다”고 보도했다. 웃자고 쓴 WSJ의 기사 하나가 서울-지역 언론 간 갈등으로 번지며 양쪽이 죽자고 달려드는 모양새다.

이 같은 상황은 수십 년 간 이어져온 서울-지역 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불신 탓이다. 앞서 지난 5일 중앙일보는 ‘이해찬이 쏜 공공기관 지방이전…“이직하겠다” 6만 직원 멘붕’이란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이를 두고 부산지역의 한 기자는 “비싼 월세주고 서울 가는 건 당연하고 지방으로 가라고 하면 회사 그만 둘 일인가. 지방은 사람 살 곳도 못 되나. 지방이 아무리 서울 식민지라 하더라도 이러면 안 된다”며 중앙일보 기사를 비판했다. 서울에 있는 언론과 원자력발전소 인근에 위치한 지역 언론은 원전과 관련해서도 뚜렷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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